鮮于鉦
도쿄특파원

8월이 지나면서 일본에서 ‘종전(終戰) 60년 무드’가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이번 무드는 전반적으로 일본이 겪은 ‘전쟁의 참상(慘狀)’에 초점이 맞춰진 게 아닌가 싶다.

1945년 3월 도쿄 대공습을 시작으로 사이판, 오키나와 결전, 그리고 8월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原爆)에 이르기까지. 공영방송 NHK의 원폭 관련 보도는 시청자들이 눈을 찌푸릴 정도로 여과 없이 당시 참상을 흘려보냈다.

상당수 한국 언론은 이런 흐름을 ‘가해(加害) 기억은 사라지고 피해(被害) 기억만 남은 일본’을 증명하는 사례로 보도했다.

교과서 문제와 A급 전범(戰犯)을 합사한 야스쿠니(靖國) 신사에 전후 최대 규모의 참배 인파가 몰린 것과 맞물리면서, 가해국의 이같은 분위기는 일본을 ‘책임을 외면하는 나라’로 외부에 비치게 했다.

물론 전체적으로 그런 측면이 있었다. 일본 주류 언론들의 8월 15일자 사설에서 일본의 전쟁책임론이 사라졌고, 8월 6일 히로시마 ‘평화선언’에서 과거사에 대한 자성(自省)은 맨 끝에 단 한 줄로 마무리됐다.

‘종전 50주년’인 10년 전만 해도 일본 지식층의 인식은 이 정도로 무책임하지는 않았다.

다만 일본 언론의 ‘전쟁 참상 보도’는 시각에 따라 다른 해석을 내릴 수도 있다.

실제로 일본에서 관련 프로그램을 보면서 “일본이 이렇게 큰 피해를 입었구나”란 느낌보다, “이래서 평화가 소중하구나”란 느낌을 더 강하게 받았다.

주제 의식이 ‘평화의 소중함’에 맞춰져 있었기 때문에 시청자로 하여금 ‘피해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전쟁에 대한 회한(悔恨)’을 느끼게 하는 방향으로 전개됐다.

사실 참상을 집중부각시키는 보도는 일본의 세대(世代) 문제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전후 60년이 지나면서 일본에선 전쟁을 모르는 세대가 전체 국민의 70%를 넘어섰다.

10년 후인 ‘종전 70주년’에는 추도식조차 사라질 것이란 예상도 나온다. 이들에게 어떻게 전쟁의 실상을 전달할 것인가? 그래서 전쟁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가지도록 유도할 것인가?

일본 방송사의 한 간부는 “대다수 국민들이 전쟁을 모르기 때문에 책임론에 앞서 전쟁의 실상을 전하는 원점(原點)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대동아(태평양)전쟁은 불가피한 전쟁” 운운하는 최근 극우적 발상의 범람도 전쟁의 참상에 대한 무지(無知)의 결과물일 수 있다는 얘기다. 지향점이 이렇다면 일본의 참상 보도는 부정적으로 볼 것만은 아니다.

일본에서 이런 보도가 줄을 이을 때 한국에선 “6·25는 통일전쟁이고 전쟁 참화의 책임은 미국”이라는 주장이 튀어나왔다.

이 주장은 “대동아전쟁은 아시아 해방전쟁이고 원폭과 대공습의 참화는 미국의 전쟁 범죄”라는 일본의 극우적 주장 및 발상법과 논리가 정확히 일치한다.

머릿속 이념이 ‘전쟁=악(惡)’이라는 현장의 절대윤리를 뛰어넘은 결과이며, 이는 한국의 좌파가 일본의 극우만큼 전쟁의 참상에 대한 공부와 교육이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전쟁을 모르는 세대’가 국민의 대다수를 이루는 것은 한국도 마찬가지다. 급격한 세대 교체로 그나마 전쟁을 경험한 소수(少數) 세대의 발언권은 일본의 전쟁 경험 세대보다 훨씬 약해졌다.

우리 역시 전쟁의 참화를 모르고 인간에 대한 깊은 연민이 없는 사람들이 전쟁을 새롭게 규정하려고 덤벼드는 위험한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su@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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