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아오모리현에서 강제징용에 시달리다 광복 직후 귀국선에 올랐다가 '우키시마호 폭침사건'이라는 의문의 사고를 만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돌아온 최석준씨가 박현경(전남대 인류4)씨에게 60년 전의 끔찍했던 징용생활과 폭침사건에 대해 생생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영암=김영근 기자 kyg21.chosun.com

일왕(日王) 항복했는데도 죽창 들고 계속 일시켜
뒤늦은 귀국선 폭발…징용자 대부분 숨져


1945년 8월 22일 밤 10시 일본 아오모리(靑森) 현해군기지에서 징용 한국인 수 천 명을 태운 4730t급 수송선 우키시마(浮島)호가 부산을 향해 출항했다.

그러나 웬일인지 배는 최단 항로를 택하지 않고 일본열도 연안을 따라 남하했다. 이틀이 지난 24일 수송선은 교토부 마이즈루항 부근을 통과하던 중 선체 중앙부에서 폭발이 일어나 두 동강이 난 채 순식간에 침몰됐다.

당시 일본 당국은 선체가 태평양전쟁 때 미군이 설치해 놓은 기뢰를 건드려 폭발했으며, 한국인 524명, 일본인 승무원 25명이 숨졌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탑승자가 7000명 이상, 희생자가 5000여명이라는 주장이 제기되는 등 정확한 진상은 60년이 지난 지금까지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 있다. 또 생존자 일부는 당시 한국인 징용자의 귀국을 방해하려는 세력이 의도적으로 폭발사고를 일으켜 배를 침몰시켰다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1992년 유가족과 생존자 80명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28억엔의 배상소송을 제기했다.

1심에서는 ‘일본정부가 승객을 안전하게 수송할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다’며 배에 탄 사실이 확인된 15명에 4500만엔을 배상하라고 명령했으나, 2심은 배상청구를 기각했고, 지난해 12월 도쿄최고재판소는 상고를 기각했다.

헤엄쳐 구조됐지만 죽이지 않을까 떨어
그때 숨진 수많은 사람 원혼 어떻게 달래나…
이렇게나마 털어놓으니 한이 풀리는 것 같아



◇1944년 5월 최석준(오른쪽)씨가 강제징용에 끌려가기 직전. 대전의 한 이발관에서 함께 일하던 친구와 찍은 사진.

―강제 징용 전에는 어디에서 살고 계셨나요?

“대전이었어. 17세에 무작정 상경해 돈암동 이발소에서 기술을 배웠지. 그런데 그곳에서는 매일같이 콩나물 죽을 먹어야 했어. 2년 만에 더 이상 죽을 먹기 싫어 대전으로 내려갔어.

‘지전이발관’이라는 곳에서 일했는데 월 150원쯤 받았지. 만주로 가면 돈을 더 벌 수 있다고 해서 이발사 면허시험을 본 뒤 모든 준비를 마치고 면허증 나오기만 기다리고 있던 차에 갑자기 강제징집을 당한 거야.”

―강제로 끌려가 일본으로 건너갔던 과정을 들려주세요.

“1944년 5월 중순이었던 것 같아. 하루는 점심을 먹으러 하숙집엘 갔더니 일본 경찰이 빨간 종이(징집명령서)를 갖고 와서는 다짜고짜 데려가는 거야.

며칠 동안 이곳저곳으로 끌려다니다 5월 23일 부산에서 연락선을 타고 시모노세키로 건너갔어. 거기서 열차를 탔는데 며칠을 달렸는지 몰라.

식사시간이 되면 5~10분 가량 멈춰서 도시락을 먹고 다시 출발하기를 반복했지. 창 밖을 내다보지 못하게 했는데 장막을 슬쩍 걷고 보니 폭격을 당해 집들이 모두 부서져 있었어.

최종 목적지인 아오모리현에 도착한 것은 6월 1일 오후였어. 밤이 되기를 기다려 기차에서 내린 뒤 숙소로 가는데 날씨가 얼마나 추운지 여름옷을 입고 갔던 모두가 꽁꽁 얼어붙었지. 다음날 일어나 보니 산에 하얗게 눈이 쌓여 있더군.”

이발사면허증 기다리다 끌려가

―징용생활은 어떠셨나요?

“그렇게 추운 날씨 속에서 판자로 지은 숙소에서 담요 6장을 깔고 덮고 잠을 자야 했어. 산속에 비행기(전투기)를 숨길 격납고를 만드는 일을 했는데 노동도 힘들었지만, 배고픈 게 가장 힘들었어.

‘죽을 데를 왔구나’ 생각했지. 게다가 일본인들은 한국인 징용자들을 무시하기 일쑤였어. 하루는 식사시간이 되어도 밥을 주지 않아 항의했더니 일본인 감독이 욕지거리를 해대는 거야. 몇 명이 달려들어 때려죽였어. 한국인 대대장이 구속됐는데, 대대원 전체가 파업을 하니 사흘 만에 풀어주더군.”

―해방 직전에는 특공대 훈련도 받으셨다면서요?

“당초 1년 약정으로 징집됐는데. 이듬해(1945년) 5월이 되자 기한이 연장됐어. 그때부터 소규모로 부대를 분리시켰는데 얼마 후 나를 포함해 20여명은 임무가 변경돼 기뢰를 배에 싣고 적 선박이 오면 부딪치는 특공대 훈련을 받았어. 한 달 남짓 그런 훈련을 받고 있던 중 해방을 맞은 거야.”

―해방 소식은 어떻게 들었나요?

“8월 15일 낮 12시 점심시간이 됐는데 다들 모이라고 그러는 거야. 일본 왕이 방송을 한다고 해 들어보니 ‘국민에 대해 황송하지만…’이라는 목소리가 나오자 라디오를 꺼버리더군.

그리고 그날은 작업을 시키지 않고 일본인들 모두 어디론가 가버렸어. 그러나 저녁이 되자 다시 나타나더니 총·칼 등 무장을 해제하는 대신, 대창을 깎아 무기로 삼고 다음날부터 다시 강제노역과 훈련을 계속 시키는 거야.

‘천황은 항복했어도 우리는 절대 승복할 수 없다’면서 말이야. 할 수 없이 5~6일간을 더 일했지. 그러더니 21일쯤에야 그 지역 징용자 등 한국인들을 모아놓고 모두 귀국시킨다고 해. 다음 날 우리들은 어마어마하게 큰 배를 타고 귀국길에 오르게 됐어. 그 배가 바로 ‘우키시마호’였던 거지.”

―폭발 순간을 좀 자세히 얘기해 주세요.

“배를 탄 지 사흘째였어. 오후 5시쯤 선실 안에 있는데 갑판 위에 있던 친구가 큰 소리로 ‘육지가 보인다’며 부르는 거야. 혹시 한국에 왔나 반가운 마음에 뛰어 올라갔지.

그런데 불과 2~3분도 안 돼 벼락치는 소리와 함께 배가 폭발한 거야. 선실로 내려가 보니 사방에 송장이 널브러져 있었어. 너무나 끔찍했지. 배는 가운데가 쪼개져 천천히 물 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했어.”

―어떻게 귀국하시게 됐나요?

“배 끝머리까지 물에 잠기자 옷을 벗어던지고 물 속으로 뛰어들었어. 헤엄치다 멈췄다를 반복하며 육지 쪽으로 2㎞쯤 갔을까. 구조선을 만났어. 구조된 사람들은 큰 교실 같은 수용소로 보내졌는데 100~150명 정도가 살아왔던 것 같아.

그러나 당시 ‘일본인들이 우리를 죽이려고 일부러 배를 폭파시켰다’는 이야기가 퍼졌기 때문에, 우리를 죽이지 않을까 하는 공포심으로 며칠을 보내야 했지.

우여곡절 끝에 시모노세키 인근 항에서 부산으로 가는 배를 탈 수 있었어. 충청지역에서 징집된 사람 가운데 살아남은 40명은 함께 부산에서 열차를 타고 대전역에 도착했는데 그날이 추석을 사흘 앞둔 날(음력 8월 12일)이었어.”

―귀국 이후 생활은 어떠셨나요?

“처음엔 대전에서 징용 갔던 동료들과 활동했었지. 그후 형님들의 권유로 목포에 내려와 결혼한 뒤 이발소를 운영하기도 했지만, 서른 살 때 복막염 수술을 하면서 고향 마을로 들어와 50년 넘게 살았어.

주류와 비료 도매업도 했고 농사도 지었지.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6남매를 키워냈으니 할 일은 한 셈이야.”

'해상 가미가제'훈련 받기도

―광복절이 되면 어떤 생각을 하시나요?

“해마다 그때 일이 생각나지. 악몽 같은 기억이지만, 너무 기가 막힌 일이라 그런지 지금도 생생해.

올해 초에 징용 갔던 사람 신고하라고 해서 신고는 했지만, 찾아와 이야기를 들으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지금껏 무슨 보상이나 그런 것은 생각해본 적도 없어. 이제 살 날도 길지 않고 돈도 필요 없어. 하지만 오늘 이렇게 옛날 이야기를 하나하나 털어놓고 나니 속이 시원해. 맺힌 한이 풀어지는 것 같아.”

―요즘 젊은 세대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은.

“우리 후손들이 제대로 잘 사는 모습을 보고 싶어. 이제 정치인들이 서로 싸우지 말고 바르게 나라를 이끌고, 젊은이들도 항상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을 갖고 살았으면 좋겠어. 다시는 나라를 빼앗기지 않도록 말이야.”/정리=김성현기자 shkim@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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