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말·문화 되찾는데도 36년 걸린다며
정인보 선생이 ‘출판 한번 해봐라’ 권유”


33살의 청년 정진숙(鄭鎭肅)은 1945년 해방을 수원형무소에서 맞았다. 1944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날 헌병대로 연행돼 8개월째 수감생활 중이었다.

죄목은 치안유지법 위반. 조흥은행의 전신인 동일은행에 다니던 착실한 회사원이었던 그가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던 중 무심결에 “전쟁은 곧 끝나고 머지 않아 독립이 올 것”이라고 말한 게 전부였다. 그러나 일제(日帝)는 조선인 엘리트 은행원에게 유언비어를 퍼트렸다며 징역1년형을 선고했다.

이때의 일을 정진숙 을유문화사 회장은 “평범한 생활인(生活人)이 보다 더 선명한 의지인(意志人)으로 바뀌는 계기가 됐다”고 회고했다. 8월 16일 밤 그는 석방됐다.

해방의 감격이 남보다 두 배일 수밖에 없었다. 은행에 갔더니 ‘혁명투사’가 왔다고 대대적인 환영이 있었다. 그러나 이미 그는 더 이상 은행원 생활을 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광복된 조국에서 ‘의지인’에게는 그리 적합하지 않은 직업이라 생각했기 때문일까?

독립온다 말했다가 수감… ‘意志人’으로 바뀌었지

해방되던 해가 을유년이어서 을유문화사라 했어

이상백씨 통해 만난 박헌영, ‘시골 샌님’ 같더군



◇을유문화사 초창기 작품들 을유문화사의 초창기 작품들은 계몽에 주안점을 뒀다. 이각경의‘가정 글씨 체첩’은 우리 문장과 글씨를 함께 공부하는 책이었고 이만규가 짓고 이각경이 쓴‘새시대 가정 여성훈’도 여성계몽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또 아동계몽을 위해‘주간 소학생'과 월간‘소학생’같은 잡지도 발간했다.

―처음부터 출판 쪽에 투신하실 생각을 갖고 계셨나요?

“그렇지 않고. 다만 은행일보다는 뭔가 나라를 위해 크게 도움이 될 만한 일이 뭘까 찾고 있다가 우연한 기회에 출판 쪽에 발을 들여놓은 거지.”

―그 이야기를 좀 자세하게 해주시죠.

“원래는 작가 조풍연(趙豊衍)과 아동문학가 윤석중(尹石重)이 출판을 하기로 합의를 보았다고 하더군. 그래서 조풍연이 초등학교 친구인 민병도(閔丙燾) 전 한국은행총재에게 돈을 대라고 했고 민병도씨는 자신과 함께 동일은행에서 일했던 나를 추천한 거야.

그런데 난 그때까지 출판하면 ‘종로네거리 암시장 같은 데서 파는 싸구려 소설 만드는 업자’ 정도로 생각했어. 못하겠다고 버텼지.

아, 그랬더니 조풍연씨가 자기 스승인 위당 정인보(鄭寅普) 선생을 찾아가서 나에게 압력을 넣어달라고 부탁했더군. 위당 선생은 나랑 한 집안이어서 늘 ‘할아버지, 할아버지’ 하면서 인생의 스승처럼 모셨던 분이거든.”

한글 활판 없어 나무깎아 인쇄

―위당 선생이 부르셨나요?

“그때 그 양반이 요즘의 감사원장에 해당하는 감찰위원장을 맡고 계셨어. 남산 근처에 있는 사무실로 불러 찾아갔더니 ‘우리가 나라 잃은 게 36년이니 나라의 말과 문화를 되찾는 데도 같은 시간이 걸릴 테니 그런 출판이라면 해 볼 만해’라고 권유하시더군.

그러면서 ‘지금 건준(건국준비위원회)이니 인공(조선인민공화국)이니 하지만 애국은 입으로 하는 게 아니야. 말 없이 나라를 위하는 게 진짜 애국이야. 출판을 통해 나라를 위하면 돼’라고 하셔서 나도 결심했지.”

―출판사 이름에 ‘을유(乙酉)’가 들어 있는 게 남다릅니다.

“내가 결심을 하고 나서 11월 30일 종로 경운동에 있던 민병도씨 집에 4명이 모였어. 그리고 해방도 됐고 하니 누가 ‘해방출판사’라고 하면 어떠냐고 그러더군. 그런데 뭔가 좌익 냄새가 나서 싫더라고.

내가 안 된다고 그랬지. 그런데 조풍연씨가 올해가 을유년이니 을유문화사로 하자고 제안해 만장일치로 그렇게 정했지. 그리고 그때는 출판사 이름에 ‘문화사’라는 걸 붙이는 게 유행이었어. 고려문화사라는 출판사도 있었지.”

―그때 혈기왕성한 30대 때였는데 정치에 관심은 없으셨나요?

“나도 이승만 박사나 김구 선생 찾아다녀봤지. 그러나 정치를 하겠다는 것보다는 워낙 국민들이 떠받드는 인물이니 궁금하기도 해서 몇 차례 방문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지. 그때만 해도 그렇게 찾아가면 반겨주셨거든.”

―그래도 출판사를 하면 좌건 우건 와서 귀찮게 했을 것 같은데요.

“그때는 그래도 사람들이 달랐어. 우리가 낸 책들이 뭐요? 다 민족의 말, 역사, 문화에 관한 것들이잖아. 당당했지. 그러니 아무도 우리를 못살게 굴진 않았어.”

―을유문화사에서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林巨正)’이 나오지 않았나요?

“그건 조금 늦게, 그러니까 1948년 3월부터 11월까지 의형제편 3권과 화적편 3권을 냈지. 그리고 나머지 4권을 추가해 10권으로 완간하기로 했는데 그 사람이 평양에 갔다가 눌러앉는 바람에 금서가 돼버렸어.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아파.”

―당대의 명사들과도 다양한 교류가 있었을 텐데요.

“우리 출판사를 이상백(李相佰)씨가 연락사무소처럼 사용했어요. 그러다 보니 정계나 학계의 거물들을 많이 접할 수 있었지. 여운형씨와도 여러 차례 만나고 술자리도 함께했어.”

―술자리에서 여운형 선생은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그분, 살아있었으면 큰일 했을텐데. 좌익이니 어쩌지 하지만 그건 잘 모르겠고 술은 많이 안 해도 늘 쾌활하고 달변이었지. 그 양반이 어디서 연설한다 하면 만사 제쳐놓고 달려가서 들었거든. 속 시원한 사자후(獅子吼)가 일품이었어. 그 이후에도 그만큼 통 큰 사람은 못 본 것 같아.”

―공산주의자 이강국(李康國)과의 인연도 깊다고 들었습니다.

“그 사람은 내 대고모 아들과 동서지간이었어. 그래서 일제 때부터 같이 마작도 하고 하면서 어울려 다녔지. 별 거 없는 사람인데 어느새 좌익에 물들었더라구. 역시 한 길 사람 속은 알 수 없는 거야.”

◇정진숙 회장이 올해 초 을유문화사에 입사한 새내기 직원 지은영씨에게 을유문화사의 첫 작품인 이각경씨의 '가정 글씨 체첩'을 보여주며 출간 당시의 에피소드를 이야기하고 있다. 주완중기자 wjjoo@chosun.com


출판협회는 우익이 맡았지

―박헌영도 만나 보셨나요?

“3번 만났어. 시골 샌님 같았지. 그리고 이승만 박사 돌아오시고 나서는 좌익들이 기를 제대로 피질 못했어. 박헌영도 사람들과의 접촉을 줄이고 늘 숨어다녀야 했지.”

―막상 출판을 시작하고 나서 어려움이 적지 않았을 텐데요.

“제일 큰 어려움은 종이 구하는 것과 인쇄시설이었어. 그때 책을 만들 수 있는 모조지는 일본이 남겨 두고 간 것을 상공부에서 관리하고 있는 게 전부였다고 할 수 있었지.

당시 정부에서는 교과서와 신문발행이 급했기 때문에 그쪽에 먼저 배정을 했지. 나라도 그랬을 거야. 그때 천주교가 힘이 세서 종이를 대량 확보해 두었더군. 경향신문을 창간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아.

나도 한국인 통역을 구워삶아 그중 일부를 확보했지. 내가 은행에 있을 때 섭외업무를 많이 해서 사람을 좀 다룰 줄 알았거든(웃음).

인쇄소에 가도 한글 활판이 없는거야. 그때 인쇄소라는 게 매일신보사, 경성일보 인쇄소, 협진인쇄 등 열개 남짓밖에 안 됐어. 그래서 처음에는 나무를 깎아 만드는 각자(刻字)로 하다가 조금 사정이 나아져 주조(鑄造)로 바뀌었지.”

―당시 출판사는 몇 개나 있었습니까?

“어디 자료를 보니까 1946년에 150개에 책은 500여종이 출간되었다고 하더군. 그러면 한 출판사에서 서너종 낸 셈인데. 아, 글쎄 우리는 그 한 해에 35종을 출간했어.

한국출판의 7%를 냈단 말이야. 우리가 처음 낸 책이 건국부녀동맹위원장을 지낸 이각경씨의 ‘가정 글씨 체첩’으로 훈민정음 서문을 비롯해 우리의 옛 한글문장들을 골라 궁체로 예쁘게 써서 만든 것이었지.”

―출판계에도 좌우익 싸움이 있지 않았나요?

“일제 때 우리말 우리글을 못 썼는데 출판계라고 할 만한 게 있나? 그런데도 처음에는 좌익들이 나서 출판협회를 만든다고 야단이었어.

그런데 이래저래 모이다 보니까 숫자면에서 우익이 훨씬 많았지. 그래서 자연스럽게 출판협회는 우익 쪽에서 맡았지. 정치계나 언론계만큼 그런 갈등은 없었어.”/이한우기자 hwle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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