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대화퇴 어장에서 조업중 납북됐다 탈북한 고만섭(62))씨가 30년만인 12일 강원도 강릉시 주문진읍 자신의 고향집에서 어머니 김영기(84)씨와 기쁨을 나누고 있다./연합

“아이고, 내 아들 맞나?” “어~머~니~.”

1975년 8월 동해상에서 오징어잡이배 ‘천왕호’를 타고 출어했다가 납북당한 뒤 올 3월 탈북한 고명섭(62)씨가 12일 30년 만에 그리던 어머니 김영기(84)씨를 만났다.

1997년 어머니 김씨 앞으로 고씨의 편지가 날아오면서 생존을 확인한 남측의 가족들은 납북자가족모임을 통해 ‘고명섭 데려오기’를 시작했고, 북에서 처음 결혼한 고씨는 우여곡절끝에 북한을 탈출해 지난 7월 20일 서울로 왔다.

고씨가 중국 내 한국 공관에 들어선 것은 지난 3월 31일이었으나 모자 상봉이 늦어진 까닭은 중국 정부와의 외교적 마찰 때문에 입국이 늦어졌고, 귀국후엔 곧바로 정부합동심문조의 조사가 이어졌기 때문이다.

납북되기 30년 전 살던 바로 그 집에서 만난 모자는 얼싸안고 눈물만 흘릴 뿐 말문을 열지 못했다.

“아이고, 으으으….” 어머니 김씨가 눈물만 흘리자 아들은 어머니를 붙잡고 위로했다. “살아왔잖아. 살아왔잖아.” 굵은 눈물만 흘리던 어머니가 아들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다시 한번 물었다. “내 아들 맞나? 맞나 틀리나 보자….”

다른 납북자 가족들은 모자 상봉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또 한번 눈물을 훔쳐야 했다.

고씨와 함께 오징어잡이배 천왕호를 탔다가 납북된 이해운(51·납북당시 21세)씨의 어머니 손봉녀(79)씨는 고씨를 붙잡고 “아이고…, 우리 아들 손톱이라도 빼오지!”라며 가슴을 쥐어뜯었다.

남편 최욱일(65)씨가 납북된 양정자(64)씨는 “점을 보니까 죽었다고 하대. 나라에서는 생사도 확인 안 해주고. 근데 중국을 통해 사진하고 편지가 왔어요. 그제야 살아있는 줄 알았지”라며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역시 천왕호 선원이었던 김구영(78)씨의 부인 이순자(75)씨는 “이산가족상봉 신청을 해도 ‘확인 불능’이라는 대답만 오고 아무 소식도 없다. 답답한 마음에 고씨에게 남편 소식이라도 듣자고 왔다”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이씨는 “손발이 얼도록 벌어 애들 키웠다”며 “납북자 가족들의 고생과 설움은 말도 못 한다”고 했다.

이날 납북자가족모임 회원들은 결의문에서 정부는 납북자송환을 대북협상의 최우선에 놓을 것과 납북자를 이산가족의 범주에 넣지 말 것, 납북자가족 및 귀환납북자를 위한 특별법을 제정할 것을 요구했다.

최성용 납북자가족모임 대표는 “정부가 북한에 끌려다니며 눈치만 볼 게 아니라 납북자의 생사확인과 이산가족상봉을 당당히 요구하라”고 다시 한번 힘주어 말했다.

이날 환영식엔 마을 주민들뿐만 아니라 북한에서 함께 지내다 탈북했던 이재근, 김병도씨도 참석했다./ 주문진=안준호기자 liba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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