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정상회담이 27일 앞으로 다가왔다. 남과 북의 최고 통치자가 마주앉는 것은 분단 이래 처음 있는 일이다. 그만큼 모든 것이 새롭기만 하다. 조선일보는 남·북한과 가장 비슷한 분단국으로서 통일을 이룬 동·서독 정상회담의 사례와 우리의 경우를 비교 분석해 연재한다. /편집자

“독일 안에 두 개의 국가가 존재한다고 해도 그 두 국가는 서로에게 외국이 아니다. 다만 특수 관계일 뿐이다. ”

1969년 10월 28일 서독의 수도 본의 ‘분데스탁(의회)’에서 막 출범한 사민·자민당 연립정부의 빌리 브란트 총리는 취임 연설에서 동독을 사실상 국가로 인정할 것임을 천명했다. 직전까지 사민당과 연정하다 야당이 된 기민당 의원들이 벌떼같이 들고 일어섰다. 기민당 원내총무가 발언대로 달려나와 “동독을 국가로 인정하는 것은 분열주의적 발상이다”고 맹렬히 비판했다. 20년 뒤 독일 통일을 이룬 헬무트 콜이었다. 브란트의 발언은 ‘동방정책’의 핵심 브레인인 에곤 바르조차도 “너무 빠른 것 같다”고 했을 정도. 그만큼 서독의 일반적 인식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튼 이 연설은 5개월 후 동·서독간의 첫 정상회담의 토대가 됐다.

2차대전 이래 동·서독은 각기 미·소 냉전체제에 편입돼 대립했다. 특히 서독은 우세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동독을 외교적으로 봉쇄한 채 소련과 통독문제를 직접 협상했다. 서독은 ‘동독과 교류하는 국가와 교류를 않겠다’는 이른바 ‘할슈타인 원칙’을 실천했던 것이다.

66년 출범한 키징거 총리(기민당)와 브란트 부총리 겸 외무장관(사민당)의 기민·사민당 연립정부의 동방정책으로 동독의 외교적 고립은 심화됐다. 서독은 동독이 국가로 승인받기 위해 67년 제의한 정상회담조차 거부했다. 동독과 민간 교류는 하되 정부간 관계 개선은 외면한 것이다.

동독도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바르샤바 조약기구(WTO) 국가들에 ‘서독이 동독과 정상적인 관계를 형성하기 전에는 어떤 나라도 서독을 승인하지 말도록’ 요청했다. 대립이 지속된 것이다. 동독의 ‘2국가’ 정책에 따라 서독도 동유럽 국가와 더이상의 관계증진이 벽에 부딪힌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서독에는 69년 10월 브란트를 총리로 한 사민·자민당 연정이 들어선 것이 과거 기민당의 벽에 부딪혀 적극 추진하지 못했던 브란트의 동방정책을 꽃 피우는 계기가 된 것이다.

브란트의 제안을 비판하던 동독의 울브리히트 국가평의회 의장(국가수반)은 그 해 12월 구스타프 하이네만 서독 대통령에게 서신을 보내 동·서독간 동등한 관계 수립을 골자로 한 국가조약안을 제시하면서 이를 협상하기 위한 정상회담을 제안했다.

브란트 총리는 70년 1월 양독 관계를 정식 국가로 인정하는 조약에는 반대하지만, ‘의견교환을 위한 기회를 갖고 분단으로 인한 고통을 덜어 보자’는 취지에서 정상회담을 수락한다.

이후 동·서독은 70년 3월 2일 정상회담 준비를 위한 첫 실무접촉을 열였다. 양측은 12일까지 불과 열하루 만에 다섯 차례의 실무접촉을 마치고, 19일 정상회담을 개최하는 것으로 발빠르게 움직였다.

/김인구기자 ginko@chosun.com

동,서독 정상회담 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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