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서 평양과 지방의 생활은 ‘한 나라안의 외국’ 이라고 할 만큼 전혀 다른 모습이다. 다음은 평양에서 지방으로 쫒겨갔던 한 여학생의 지방생활 수기다. 필자 한수정은 태어나서 17년동안 평양에서만 살다가 어머니의 정치적 발언이 문제가 돼 ‘가족혁명화’라는 이름으로 1996년 함북 김책시로 추방령을 받았다. /편집자

지방에 한번도 가보지 못한 나는 너무도 기뻤다. 지방에 내려가면 초가집 앞에는 냇물이 흐르고 뒷산에는 과일나무를 심어서 사과를 따먹고... 동화책에서 본 ‘무릉도원’ 같은 낙원을 꿈꾸었다. 드디어 ‘정배살이’ 가는 날! 평양역에 기차표를 끊으려고 나갔는데 표가 없다고 다음날 가라고 했다. 당중앙에서는 그날 당장 떠나라 하고, 역에서는 표가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당중앙이 세다지만 표가 없는데 어쩌겠는가. 하룻밤 평양에 더 머물렀다. "정배살이도 가려다 못가면 섭섭하다"고 했던가.

다음날 기차에 올랐다. 기차가 출발하는 첫 역인데도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그 속에서도 우리 가족은 용케 자리를 잡았다. 김책시까지 예정시간은 12시간 정도였지만 이틀이 걸렸다. 엉치에 구멍이 날 정도였다. 상상을 못할 만큼 사람이 너무 많아 화장실도 못가고 기차가 역에 정차하면 창문을 통해 나갔다 오곤 했다. 태어나서 처음 목격한 상황들이었다.

새벽 2시 추방지에 도착, 기차에서 내려 역으로 나가는데 듣기 이상한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강한 옥타브, 알아듣기 어려운 말들, 함북 사투리였다. 불빛이 한두 점만 보일뿐 캄캄하고 음침한 역이었다. 평양의 거리와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아버지 직장에서 김책시에 집이 있는 사람을 함께 보내주어서 그 아저씨네 집에서 숙식을 할 수 있었다.

다음날, 영원히 살아야 할지도 모르는 추방지를 구경하기 위해 우리 가족은 시장(장마당)부터 찾아갔다. 장마당은 주민들의 생활 현황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좋은 곳이기 때문이다. 시장으로 가는 길에 우리는 못 볼 광경들을 보았다. 거리에 다 해진 옷을 입고 머리는 언제 감았는지 헝겊처럼 엉키고 손은 때가 너무 껴서 새까만 어린 아이들과 노인들이 쓰러져 있었다.

더구나 사람들이 그 광경을 못본 척하고 그냥 지나가는 것을 보고 우리 가족은 깜짝 놀랐다. 그 사람들을 도와주려 하자 옆에 같이 가던 아저씨가 그냥 가자고, 주기만 하면 주위에 많은 아이들이 몰려들 거라고 했다. ‘동방예의지국’이라는 말이 무색했다. 쌀독에서 인심 난다고 김책시는 1992년부터 식량을 공급받지 못했다고 했다.

장마당에 들어가서 돌아보니 그야말로 도깨비시장이었다. 쓰던 그릇가지, 이불, 숟가락... 상태는 안 좋았지만 정말 없는 게 없었다.

너무 맛있게 생긴 빵이 있길래 5원을 내고 하나 샀다. 한 입을 떼어먹고 그 맛을 음미해 보는 순간, 누군가 내 손에서 빵을 홱~ 나꿔챘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꾀죄죄한 아이가 힐끔힐끔 돌아다보며 냅다 달렸다. 그 속도가 놀라웠다. 주변에서 물건 팔던 아줌마들이 히죽히죽 웃었다. 지방에 가면 평양사람은 금방 티가 난다.

김책은 바닷가라 물고기가 많았다. ‘평양촌놈’이 처음 보는 물고기들도 많았다. 게도 어찌나 크고, 털도 많은지. 평양에서는 생물시간에 그림으로만 보던 물고기들이 김책시에는 산 채로 널려 있었다. 시장에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기업소 생산이 대부분 멎고 나니 사람들이 돈을 벌려고 장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첫 나들이는 우리가족에게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막막감을 안겨주었다.

/한수정ㆍ연세대 사회학과 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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