洪官憙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북핵 문제가 해결의 단서를 찾지 못하던 중 개최된 6·10 한·미 정상회담과 이번 평양에서의 6·17 김정일·정동영 만남은 핵문제 해결과 북한의 대남노선 향방에 관한 새로운 단서와 문제점들을 제공해주고 있다.

우선 6·10 한·미 정상회담에 관한 한, 그것이 어떠한 형태로든 문제의 해결이나 양국 정상 간의 합의나 결단이 아니라, 사실상 문제의 일시적 유보 또는 봉합이었다는 점을 부정하기 어렵다.

양국 정상은 그동안 금과옥조로 여겨 온 ‘북핵 불용’과 ‘평화적 해결’의 두 원칙에 합의하였으나, 북한의 가속화되는 핵무장 기도로 인해, 이 원칙들은 현실적으로 양립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곧 북핵 저지를 위해 비(非)평화적 방법을 동원할 것인지, 평화적 해결을 고수한 나머지 북핵을 방임할 것인지의 선택과 결단이 필요한 시점에 도달한 것이다.

양국 정상은 이 문제를 일단 6·15 평양축전과 이어지는 6·21 남북 장관급 회담 이후로 미룬 것으로 보인다.

평양축전 기간 중 공식 예정에 없던 김·정 회담이 전격적으로 이루어졌고, 김정일은 ‘한반도 비핵화는 유효하며’ ‘6자회담을 거부한 적이 없고’ ‘미국이 업수이 여기기 때문에 맞서려고 했던 것’ 등 예상외 발언들을 해서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문제는 그동안 북핵에 관하여 한국과 국제사회가 견지해 온 기본인식에 배치되는 김정일의 이러한 발언의 진의는 무엇이며, 과연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이다.

첫째 가능성은 최근 북핵 저지를 위해 한반도 주변에 증강된 미국의 군사 압박의 예봉을 피하기 위한 우회전술일 수 있다.

지금까지 한반도 핵·미사일 위기시에, 이를 결국 수습한 것은 한·미의 강력한 군사적 억지력에 기인하였음을 고려할 때, 이러한 측면을 간과할 수 없다.

둘째는,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라는 과제에 몰두해 있는 한국에 대한 새로운 ‘데탕트’ 전략일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6·15선언 5주년을 맞이한 한반도는 그 어느 때보다도 통일·자주·평화의 분위기에 젖어 있다.

그리고 그 핵심에 ‘민족공조론’이 자리잡고 있다. 평양에서 열린 ‘민족축전행사’는 이러한 평화·민족 중심의 데탕트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켰다.

북한은 미국으로부터 거세게 가해지고 있는 압박을 우회하고, 남한과의 이른바 ‘제2의 6·15 데탕트’를 통해 반미(反美) 통일전선을 구축함으로써 미국의 대북 강경정책을 약화시키고자 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북한의 ‘핵 억제력’이 “민족 전체를 보호해 주고 있다”거나, “한반도에서 미국의 핵위협부터 제거해야 한다”는 그들의 주장이 이를 입증한다.

지금까지 있었던 한국 지도자들과 김정일 간 면담에서 합의된 약속들 중 실행된 것이 별로 없다는 점에서, 김·정 만남의 장밋빛 전망에 대한 경계를 요한다.

우리는 유창한 말보다 행동과 실천을 통해 상대방에 대한 신뢰를 갖는 지혜가 필요하다. 북핵 문제는 더 이상 유예될 수 없는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

북한은 조건 없이 6자회담에 복귀함으로써 김정일의 6·17 발언을 실천해야 한다. 우리는 그의 약속에 만족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6자회담 복귀와 실증을 통한 핵포기를 목도할 때까지 경계를 늦추어서는 안 된다.

한국의 2005년 6월은 ‘데탕트’로 포장된 새로운 형태의 위험과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민에게 절실히 요청되는 것은 자유세계와 공산독재, 선과 악, 그리고 우리의 생존과 평화를 위협하는 적대세력과 이에 공동대처하는 우군을 확실히 구분·인식할 수 있는 도덕적 판단력이다.

나탄 샤란스키의 언급처럼 ‘도덕적 명료함’(moral clarity)이야말로 ‘어둠의 세계’와의 투쟁에서 반드시 필요한 전제조건이다.
저작권자 © 조선일보 동북아연구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