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자리를 안 떠날 것이요. 이광수의 목을 베어 종로 네거리에 매달아 정말 친일파가 없어진다면 나의 할 일은 다한 것이오. ”

춘원(춘원) 이광수의 막내딸 이정화는 이화여고 재학시절 쓴 책 ‘아버님 춘원’에서 해방직후 친일파로 몰린 춘원의 심정을 이렇게 전했다. “일본 사람만이 아버지를 미워하고 잡아가는 줄 알았더니, 이제는 우리나라 사람이 또 아버지를 잡아가고 미워하는구나 하고 생각할 때에 슬프고 괴로웠다”고 그는 쓰고 있다. 그가 책을 쓴 것은 춘원이 효자동 집에서 납북된 지 2년 후의 일이다.

6·25 전란 와중에 유학을 떠나 미국에 정착한 이정화(이정화·65)씨가 최근 서울대 초빙교수로 방한, 고국의 강단에 섰다. 수의과대학에서 일주일에 5시간 생화학을 강의하고 실험지도도 한다. 미 부린모어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지금도 펜실베이니아 대학병원 면역학 실험실에서 연구활동을 하고 있는 과학자. 아버지의 문학적 유전자와 산부인과 전문의였던 어머니(허영숙)의 과학적 재능을 동시에 이어받은 것이다.

8일 수원 수의과대학 연구실에서 만난 이씨는 “어린 시절 문호의 딸이라고 대접도 받았지만, 친일파의 딸이라고 욕도 많이 먹었다”며 “춘원 이광수의 딸이라는 것이 멍에처럼 느껴졌다”고 회고했다. 반세기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아버지의 친일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도 가슴에 응어리진 것이 많은 듯 했다. 그러나 그는 말을 아꼈다. 다만 “아버님의 친일을 (속시원히) 해명하지 못하는 것이 딸로서 가슴 아프다”고 했다.

그러면서 춘원이 상해임시정부에서 활동하다 귀국할 때 도산 안창호가 북경역까지 배웅 나와 모자를 서로 바꿔 쓴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버지가 정말 친일을 했다면 이런 일이 가능했겠느냐”는 항변이다.

춘원의 마지막 행적은 아직도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의 묘는 지난 91년 장남 영근씨에 의해 확인됐다. 영근씨는 북한당국의 연락을 받고 혼자 북경을 거쳐 평양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당시 북한측 안내자는“친일은 했지만 상해시대 독립운동을 했기 때문에 이렇게 모신 것”이라고 설명했다.

춘원의 가족들은 모두 미국에서 살고 있다. 영근 씨는 존스홉킨스대학 물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장녀 정란씨는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은퇴했다. 워싱턴대학 조교수(비교문학)인 손녀 성희씨는 춘원이 쓴 한국 최초의 장편소설‘무정’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씨는 춘원이 해방 전까지 머물며 ‘돌베개’와‘도산 안창호’를 집필한 경기도 남양주시 사릉 집에 강한 애착을 보였다. “기념관도 좋지만 지금 그대로 보전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는 “춘원 기념사업을 다각도로 구상 중”이라며 “무엇보다 문학을 사랑하는 젊은이들을 위해 ‘이광수 문학상’을 제정하고, 장학금을 주는 것이 아버님의 뜻을 기리는 가장 좋은 방법인 것 같다”고 말했다.

서울대와 서울대공원이 공동으로 추진 중인 야생동물보전운동에도 깊은 관심을 보여 1만달러의 기금을 선뜻 내놓았다. 조만간 1학기 강의가 끝나면 사릉 집을 둘러본 뒤 오는 21일 미국으로 돌아갈 예정이다.

/글=승인배기자 jane@chosun.com

/사진=이기룡기자 krle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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