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을 에리히 로베르트 레셀(Erich Robert Ressel, 1919~1975)이라고 했다, 삼천 장도 넘게 북한 사진을 찍어온 그 사람 말이다. 건축설계사인 그는, 1956년 12월 동독의 ‘북한건설단’ 일원으로 함흥에 파견되었다. 당년 37세로 건축에 관한 일이라면 미장일부터 설계에 이르기까지 두루 통달하였던 레셀. 그 때 북한에는 소련, 동독, 폴란드 및 헝가리 등에서 파견된 기술자들이 복구사업에 열성들이었다.

전쟁 때 공습으로 쑥대밭이 되고 만 흥남 공업단지, 신포 항, ‘붉은 수도’ 평양, 그리고 도처에서 발견되는 동강난 다리 등. 이런 참혹한 상처를 카메라에 옮겨 담으면서 레셀은, 눈시울을 적실 때도 꽤 많았다.

북한 당국은 안전수칙을 내세우면서 레셀 같은 외국인 기술자들이 국내 여행을 하지 못하게 막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기술자로 능력을 널리 인정받았던 레셀은, 그런 제한을 비교적 덜 받았다. 즐겨 찾았던 함흥, 성천강 및 동해안은 물론이고, 흥남, 서호, 신포, 북청 일대, 아울러 판문점, 개성, 평양, 금강산, 개마고원, 이원 및 단천까지 모두 가보았던 것이다.

그의 사진들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나는 문득 ‘금단(금단)의 땅’ 북한을 직접 체험한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기도 한다. 땔감을 찾아서 산과 들을 헤매는 가난한 도시민들, 그들은 가족의 식량 때문에 곡물 시장에 몰려들기도 했었다. 삶의 이런 고달픈 현장을 레셀의 카메라는 용케도 잘 붙들어 놓았다. 50년대 후반 북한에서 추진되었던 이른바 협동화(국영 또는 공영화) 사업, 그 속도에는 상당한 지역차가 있었다. 레셀의 사진을 보면 예컨대, 함흥평야에서는 이미 공동생산과 공동분배가 이루어지고 있었으나, 북청 같은 산골에서는 개별생산이 보통이었다.

우리의 상상을 뒤엎는 장면도 여럿이다. 한가지만 예로 든다면, 산간 오지인 흥원에서는 1957년까지도 유교식 사당(사당) 제례가 옛 모습 그대로 시행되었다. 레셀의 사진 속에 생생한 모습으로 아로새겨진 북한, ‘찢긴 산하(산하)’가 지금 손짓하며 우리를 부르고 있다.

백승종(서강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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