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국경 마을에 도착한 선옥이가 동남아 국가와의 접경지역까지 태워주고 국경에서 길을 안내할 한족 청년과 비용 흥정을 한 뒤(첫 번째), 선옥이 일행이 차에 올라타고 있다.(두 번째) 이들은 15분쯤 국경의 작은 마을(세 번째)을 가로질러 차를 타고 가, 걸어서 10분 만에 국경을 넘었다. 세 번째 사진의 오른쪽으로 꺾인 길을 지나면 곧바로 국경이다.

미국의 북한인권법 발효 이후 강경해진 중국의 탈북자 강제송환 정책으로 중국에 떠돌고 있는 수십만 탈북자들은 생존의 갈림길에 서 있다. 공안에 적발돼 북한으로 압송되거나 한국행을 위해 제3국으로 탈출할 수밖에 없다.

해외공관 진입이 주요 탈출 루트로 각광을 받았지만 최근 삼엄한 단속으로 여의치 않다. 반면 한국 정부는 ‘탈북 브로커’에 의한 ‘기획탈북’을 규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외부의 도움 없이는 사실상 탈출이 불가능한 탈북자들은 ‘줄(브로커)’을 찾고 있는 게 현실이다.

조선일보 취재팀은 11월 23일부터 12월 18일까지 두리하나선교회측의 도움을 받아 탈북자 6명이 한 동남아국가의 국경을 넘기까지 26일 동안 장장 8000㎞의 탈출 여정을 동행 취재했다.

“눈물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습니다.” “서울 가서 돈 실컷 벌겠습니다.”
지난 17일 오후 1시(현지시각). 부흥이 엄마(44)와 ‘모세 아저씨’(51)는 한마디씩 남기고 선옥(24)·은미(29) 등 일행과 함께 야트막한 야산의 정글 지역으로 뛰어 순식간에 사라졌다. 20분 뒤, 혼자 남은 기자의 핸드폰이 울렸다. “무사히 국경을 넘었다”는 연락이었다.

차에서 내려 걸어서 국경을 넘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10여분. 야산 너머 구릉지 쪽으로 내려가자 실개천이 흐르고 철조망이 쳐진 국경이 나타났고, 근무 중인 이 동남아 국가의 군인들에게 ‘가짜 중국 신분증’을 보여주고 출입증을 발급받았다고 했다. 국경을 넘는 대가로 1명당 150위안(한화 약 2만1000원)씩을 지급했다고 한다.

탈북자 6명과 안내인 등 일행 7명 가운데, 첫 팀으로 탈북자 4명이 중국 윈난(雲南)성의 마지막 국경마을에 도착한 건 낮 12시40분이었으니, 숨막히는 ‘월경 작전’은 1시간도 채 안 돼 막을 내린 셈이다.

남은 3명은 앞서 국경도시로 접근하던 중 버스 안에서 중국 군인들에게 붙잡혔던 부흥이(19)와 미선이(25), 그리고 이들을 찾으러 되돌아간 안내인 박 노인(64) 등이다. 이들도 다음날인 18일 오전 11시 핸드폰으로 “서울에서 만납시다”라는 말을 기자에게 남긴 채 총총히 국경을 넘을 수 있었다.

그들은 이 ‘10분간의 월경(越境)’을 위해 지난달 23일 옌지를 출발한 이후 26일 동안 숱한 고생과 체포의 위기를 넘겼다.

◇탈북자 일행이 17일 중국 국경으로 출발하기 위해 버스 터미널에서 기다리던 중 함께 오다 붙잡혔던 부흥이와 미선이에게서 ‘풀려났다’는 연락을 받고 있다.

국경을 넘기 전날인 16 일 오후 5시50분 쿤밍(昆明)의 한 변두리 주택가. 탈북자 5명이 중국에서의 마지막 저녁상 앞에 모였다. 기도 소리는 떨렸다. 1시간 뒤면 이곳을 떠나 700여㎞ 떨어진 한 동남아 국가와의 접경까지 15시간을 버스로 가야 한다. 이틀 전 ‘척후병’으로 떠나 국경마을에서 기다리고 있는 박 노인과 중국어에 능숙한 선옥이와 합류할 예정이다.

앞으로 15시간이 운명을 갈라놓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인지, 잉어탕, 돼지고기 볶음, 메추리 알, 김치 등 꽤 푸짐한 상이었지만 일찍 숟가락을 놓았다. 부흥이가 잉어탕을 요리한 모세 아저씨에게 “아저씨, 솜씨 좋은데요…”라고 너스레를 떨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모세 아저씨가 “이게 마지막 만찬이니 눈물 없는 세상도 멀지 않았다”고 말하자 숙연해졌다. 부흥이 엄마는 “서울에선 어떻게든 부흥이를 공부시키겠다”고 했다.
부흥이는 중학교 3학년 정도로 어려 보이지만 중국어를 곧잘 하는 데다 머리가 좋아 사실상 일행의 리더였다.

부흥이가 마지막으로 안전수칙을 주지시켰다. “버스에 타서는 가급적 서로 말을 하지 마세요. 검문에 걸리더라도 다른 사람은 아는 체하지 말고, 항상 혼자입니다”라고 당부했다. 모세 아저씨와 미선이는 가짜 신분증의 주소와 이름을 외우고 중국어 발음을 연습했다.

“뒷문으로 두세 명씩 나갑시다”라는 부흥이의 말이 출발신호였다. 오후 7시50분 쿤밍에서 국경 부근 도시로 향하는 침대 버스에 올랐지만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밤 12시가 넘어서도 자다 깨다를 반복하며 뒤척였다.

새벽 3시40분쯤 인민해방군이 버스를 세우고 “검문을 하겠다”며 버스 실내등을 켜자 다들 놀라 얼어붙었다. 하지만 일행은 이불을 푹 뒤집어쓴 채 잠에 곯아떨어진 것처럼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취재팀도 만일에 대비, 이불 속에서 카메라의 메모리칩을 빼 숨겼다.

군인은 맨 처음 은미에게 다가가 몇 번 흔들고 “신분증”이라고 말했다. 은미는 그제서야 몹시 귀찮다는 듯 뒤돌아누운 채 신분증을 꺼내주는 연기를 능숙하게 했다. 가짜 신분증의 사진과 얼굴이 너무 다른 데다 중국어까지 서툴러 일행들의 걱정을 샀던 모세 아저씨도 군인이 한참을 쿡쿡 찔러댄 뒤에야 빼꼼히 손만 내밀어 신분증을 줬다.

부흥이의 신분증을 받아든 군인은 “왜 가짜 신분증을 갖고 다니느냐”고 했다. 진짜 신분증엔 ‘中國’이라는 글자가 홀로그램 처리돼 있지만 부흥이 것은 잘 보이지 않았다.

미선이도 걸렸다. 다른 사람은 모두 잠든 척했던 데 반해, 어찌된 일인지 미선이는 정말로 곤하게 잠들었다가 얼결에 깨 군인과 정면으로 얼굴을 마주치는 바람에 가짜 신분증의 사진과 다르다는 게 들통났다. 하지만 부흥이와 미선이는 “일행이 있느냐”는 군인의 다그침에도 약속대로 “혼자”라며 끌려나갔다.

아들이 잡혀가는 것을 지켜만 볼 수밖에 없는 부흥이 엄마는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소리 없이 우는 듯했다. 6개월 전 몽골 쪽으로 탈출을 시도하다 붙잡힌 둘째 딸의 소식도 아직 모른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마저 잃어버릴지 모른다는 절망감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침 7시40분, 국경에서 100여㎞ 떨어진 작은 도시에 도착하기 직전 일행은 낭보를 받았다. 간밤에 버스에서 붙잡혀 갔던 부흥이와 미선이 가운데 부흥이가 천신만고 끝에 풀려났다는 소식을, 은미의 휴대전화로 알려온 것이다. 얼마 후 이번에는 선옥이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미선이도 풀려난 것이다. 박 노인은 “휴대전화로 부흥이와 연락해 둘이 같이 기다리고 있으라”고 한 뒤 버스로 4시간 가량 떨어진 검문소가 있는 마을로 이들을 데리러 떠났다.

마음이 가벼워진 일행 4명은 국경마을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낮 12시40분쯤 마을 버스 정류소에 도착하자 낡은 픽업 트럭 두 대가 기다렸다. ‘미스터 허’라는 한족 청년과 흥정한 뒤 일행은 트럭에 올라 마을을 떠났다. 15분쯤 빽빽한 정글 속을 달린 후에 국경에 닿았다.

탐사보도팀
/이진동기자 jaydlee@chosun.com
/이길성기자 atticus@chosun.com
/염강수기자 ksyoum@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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