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로 예정된 남·북정상회담에 거는 국민적 기대는 자못 크다. 지난 50년 이상 반목과 불신으로 점철되어온 민족분단사의 맥락에서 볼 때 기대와 흥분은 지극히 당연하다. 분단과 갈등에 종지부를 찍고 평화와 통일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역사적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그러나 지나친 기대는 금물이다.

정상회담의 성과는 본질적으로 그 성격에 따라 좌우된다. 정상회담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그 첫째는 서명형 정상회담이다. 실무진들이 모든 의제를 사전에 검토하고 합의한 후, 정상들이 만나 서명만 하는 일종의 의전형 정상회담이다. 일반 외교관례에 비추어 볼 때 대부분의 정상회담은 이 유형에 속한다.

두번째는 실무타결형 정상회담이다. 이 경우는 국가 정상들이 직접 만나 구체적 협상을 전개하고 합의를 구하는 방식이다. 캠프데이비드 평화협정이 그 대표적 사례라 하겠다.

마지막으로 탐색형 정상회담을 들 수 있다. 적대국가들끼리 서로의 의중을 탐색하고 대화와 협상의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이러한 형태의 정상회담을 개최할 수 있다. 1970년 3월 최초의 동·서독 정상회담이 이 부류에 속한다.

이번 남·북정상회담은 다분히 탐색형 성격을 띠고 있다. 탐색형 정상회담에서는 위험을 최소화하고 그 제약하에서 성과를 극대화하는 ‘미니맥스(Minimax)’ 전략이 가장 바람직하다. 이 경우 미시적이고 복잡한 사안을 실무적으로 다루기보다는 서로의 의도를 파악하는 데 역점을 두어야 한다.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그동안 누적되어온, 서로간에 왜곡된 이미지를 극복하고 새로운 신뢰의 계기를 만들 수만 있어도 이번 회담의 의의는 크다 하겠다. 탐색의 긴장을 넘어서 두 정상이 밝게 웃는 기념사진 한 장만으로도 한반도 평화를 향한 의미있는 진전이 될 것이다.

거기에 이산가족의 재상봉, 경제협력과 그에 따른 이중과세 방지 및 상호투자보장협정 체결, 그리고 사회·문화 교류의 활성화 등에 대한 포괄적 합의가 있게 된다면 큰 성과라 할 수 있다. 만일 두 정상이 기본합의서에 명시된 평화공존과 신뢰구축, 그리고 한반도 냉전구조의 해체를 천명하는 가칭 ‘평양선언’이라도 채택한다면 그 이상 바랄 것이 없다.

그러나 이러한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번 회담은 남과 북 모두에 긍정적인 부수효과를 가져 올 수 있다. 남한의 경우 이번 회담을 계기로 동서의 벽, 여·야의 벽, 진보와 보수의 벽을 허물고 우리 국민 모두가 한마음으로 남북문제에 단결된 모습을 보인다면 이처럼 반가운 성과는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정부는 사회 각계의 의견을 더욱 성실하고 겸허하게 수렴해야 할 것이다. 야당과의 정책공조는 물론이거니와, 이번 회담의 의의와 성과를 정부·여당이 독점해서는 안될 것이다. 6월 정상회담이 김대중 정부가 취해온 포용정책의 결과라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7·4 공동성명, 남·북기본합의서, 그리고 불발로 끝난 94년 7월 정상회담 등 남북관계사의 연장선상에서 그 의의를 부여해야 할 것이다. 이처럼 과거의 노력을 인정해 줄 때 국민적 합의기반은 더욱 공고해 질 것이다.

이번 회담을 계기로 북한 측의 변화도 기대해 볼 수 있다. 북한이 이번 회의에 전향적으로 임하고 있는 것은 김일성 주석의 통일유훈(유훈) 실현이라는 명분론과 경제위기 극복이란 실용론의 변증법적 결과라 할 수 있다. 그 동기야 어떠하든, 김정일 위원장이 이번 회담을 통해 남한 측의 평화공존 의지를 직접 피부로 느끼고, 남한과의 상생과 공조를 통해 하나의 정상국가로서 국제사회의 건설적 일원으로 발돋움할 수 있다면 이는 무척 바람직한 변화라 하겠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탐색형 정상회담에서 큰 성과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더구나 이번 정상회담은 역사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역사의 조심스런 시작이다.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처럼 새로운 도전과 시련이 수반될 수도 있다.

따라서 겸허하고 신중한 마음으로 탐색에 임하면서, 북한과 그 지도자의 마음을 읽고 쉬운 것부터 차근히 풀어나가야 할 것이다.

/ 문정인 연세대 정외과 교수·통일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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