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한국전이 발발할 때 동아시아에서의 공산혁명 운동은 새로운 세력과 진전의 계기를 이미 확보하고 있었다.

당시 소련은 김일성 주도의 한국전에 대한 대규모 군사원조를 사전에 제공했으나 군사적 불개입 원칙과 북·중 협력구도에 의한 한국전 수행이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이에 비해 모택동과 지도부는 중국 내부의 공산화가 미완결(국민당의 대만 점령)이라는 점과 중국 공산혁명의 대외 확산 및 국제적 지위향상의 계기라는 상충된 이해로 인해 쉽사리 참전을 못하다 중·북한 공산주의자들간의 역사적 유대관계 등으로 인해 개입하게 됐다.

이에 대해 스탈린도 50년 7월 초 중공군에 대해 항공엄호를 약속했으며 이를 위해 122대의 MIG 15 전투기를 포함, 소련 항공사단으로 하여금 만주지역에 주둔토록 했다.

그러나 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 이후 전세가 역전되자 스탈린은 미국과의 직접적인 군사대결 회피를 위해 대중(대중) 군사지원과 관련한 그의 태도를 변화시키면서 단지 항공지원만을 언급한 채 10월1일자 전문을 통해 중공군의 대규모 한국전 급파를 요구했다.

모택동은 중·소 동맹조약에 의구심을 갖게 됐으며 중·소 양국은 2주 이상의 협상 끝에 소련은 실질적인 군사지원을 하는 대신 중공군이 참전하는 것으로 결론지었다.

휴전협정 단계에서 중·소 양국은 김일성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쟁 이전의 상태로 원상회복시키는 것을 최선의 목표로 한다는 협상전략에 이해를 같이하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한국전을 통한 중국과 소련의 관계는 잠재적 갈등과 협력이 교차했다고 볼 수 있다. /첸 지안 미 남일리노이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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