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先敏
문화부 차장대우

한 사회의 정치세력은 ‘보수’와 ‘진보’ 또는 ‘우파’와 ‘좌파’로 나뉜다. 하지만 동질적으로 보이는 각 집단의 내부에는 다시 그 지향점에 따라 여러 그룹이 존재한다.

그리고 동지끼리의 ‘노선 투쟁’은 적과의 ‘이념 투쟁’ 못지않게 때로는 더 격렬하게 이뤄진다. 역사 속의 어느 혁명기든 노선 투쟁의 승부는 생사(生死)를 갈랐다.

그보다는 덜 하지만 민주국가에서도 정당이나 단체에서 불꽃 튀기는 노선 투쟁이 벌어지는 것은 흔한 일이다.

지금 한국의 ‘보수’와 ‘진보’, ‘우파’와 ‘좌파’ 내부에도 역사관과 지향점을 달리하는 그룹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가장 큰 차이는 ‘미래 지향’이냐 ‘과거 지향’이냐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한국의 정치세력은 다시 ‘미래 지향 보수’ ‘미래 지향 진보’ ‘과거 지향 보수’ ‘과거 지향 진보’로 세분할 수 있다.

‘미래 지향 보수’와 ‘미래 지향 진보’의 차이는 21세기 한국의 방향이 영미형(英美型) 국가냐, 불독형(佛獨型) 국가냐에 있다. 전자는 19세기 이래 세계를 지배해온 영미 자본주의와 그 이념적 기반인 (신)자유주의가 불가피하다고 본다.

‘성장’ ‘경쟁력’ ‘선택과 집중’ 등이 키워드다. 반면 후자는 영미 자본주의가 초래한 빈부 격차와 사회적 불평등을 지적하며 보다 평등하고 공동체적인 사회를 구상한다.

‘분배’ ‘복지’ ‘분권과 분산’ 등이 키워드다. 양자의 대립은 우리가 앞으로 가야 할 길을 두고 발생하기 때문에 공존과 토론, 절충이 가능하다.

‘과거 지향 보수’와 ‘과거 지향 진보’의 차이는 그 모델이 박정희냐, 김일성이냐에 있다. 전자는 박정희가 이룩한 경제 성장을 높이 평가하고 민주화 이후 한국이 쇠퇴하고 있다고 본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 다시 ‘그 시절, 그 체제’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후자는 김일성이 한반도 북쪽에 세운 ‘자주 국가’를 높이 평가하고 남쪽에도 그에 가까운 사회를 만들려고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사회를 지배해온 친일(親日) 친미(親美) 세력을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양자의 대립은 우리가 지난날 걸어온 길을 두고 발생하기 때문에 사생결단(死生決斷)만이 있을 뿐이다.

문제는 현재 한국에서 정치 대결의 주(主)전선이 ‘과거 지향 보수’와 ‘과거 지향 진보’ 사이에서 형성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국가적 과제들이 미래가 아니라 과거를 준거로 논란이 벌어진다.

(행정)수도 이전 논쟁은 국가 발전의 길이 ‘선택과 집중’이냐 ‘분권과 분산’이냐보다는 ‘주도 세력 교체’ ‘기득권층 해체’ 의도 여부를 놓고 벌어진다.

국가보안법 논쟁도 인권과 국가 안보의 조화를 이루고 북한뿐 아니라 다른 국가도 대상으로 하는 탈(脫)냉전적 국가 안보체제를 어떻게 구축할 것인지가 아니라 지난날의 문제들을 둘러싼 공방 차원을 넘어서지 못한다.

결국 오늘의 난국을 벗어나는 방법은 정치적 담론의 주도권을 ‘미래 지향 보수’와 ‘미래 지향 진보’가 잡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각 정치세력 내부에서 노선 투쟁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보수’와 보수를 가장한 ‘수구’, ‘진보’와 진보를 가장한 ‘퇴보’의 차이가 드러나게 해야 한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그 과정을 거치고 나야 비로소 한국이 지향할 미래 선진사회의 모습을 놓고 제대로 된 토론이 가능할 것이다.
/smlee@chosun.com
저작권자 © 조선일보 동북아연구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