洪晟弼
북한인권시민연합 기획이사·전 이화여대 교수

동서진영의 냉전이 극에 달했던 1960년대에, 미국과 소련의 함선 간에 친선을 위한 교환 승선의 행사가 치러졌다.

축사와 이어진 파티 후 귀환시각이 다가오자 소련측은 결원이 생긴 것을 알게 됐다. 소련측 주방장 한 사람이 미국 함선의 선실 아래에서 온몸을 배에 묶고 자유를 위한 망명을 요청했던 것이다.

화해의 장소가 돌연 치열한 냉전의 현장으로 바뀌었다. 미국의 조야는 들끓기 시작했고, 정부는 지극히 어려운 선택을 해야만 했다. 망명을 인정하면 오랜만에 해 보려던 소련과의 화해 노력은 물거품이 되고, 거부하면 미국의 정체성(正體性)이 상실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결국 망명 요청이 받아들여졌다. 미국은 자유의 땅이고 자유를 찾는 이를 외면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국 땅을 헤매며 자유의 땅으로 가고자 하는 탈북자들을 돕는 일은 그들이 착하고 예쁘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이 ‘북한’ 출신이어서도 아니다. ‘자유’를 찾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인권은 사람이기 때문에 단지 그 이유만으로 모든 이에게 주어지는 권리이다. 흉악범이어도, 일제의 앞잡이였다 해도 동일하다.

응보나 정치적 흥정과 같은 다른 동기들로 인해 차별적 시각을 가지는 순간 곧바로 자가당착에 이르게 된다. 나의 권리는 인권이고 그들의 권리는 억지부림이 된다.

근대국가 체제에서 인권보호의 1차적 책임은 국가와 정부에 주어진다. 유엔회원국으로서의 의무이고, 헌법상의 책무이며, 국민과 국제사회에 대한 근본적 도리이다.

국제인권법은 인권유린을 저지를 수 있는 국가를 감시하고, 동시에 국가에 인권 보호의 엄중한 의무를 지우고 있다. 동(東)티모르인들을 돕는 것도, 이라크인들을 지원하는 일도, 무엇보다 탈북자들을 돕는 일은 국가의 의무이다.

NGO들에 대해 “탈북 유도 및 조장을 자제하고, 북측의 테러 위협에 대비하라”고 한 정부의 메시지는 옳지도 현실적이지도 않다.

첫째로 탈북자 보호는 정부의 책무라서 그렇고, 둘째로 NGO단체들은 중국이나 북한과 같은 국가와 정권을 상대로 큰일을 벌일 능력과 자원을 갖추고 있지 않다.

그들은 사실상 불과 한 줌의 사람들이며, 그들 자신이 숨고 쫓기며 스스로의 인권이 박탈될 수 있는 위기 속에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셋째로 북측의 보복 발언이 나왔을 때 정부가 할 일은 NGO들에 대한 경고가 아니라, 북측에 대한 단호한 의사 전달이어야 했다. 국민의 안전을 위협하는 그 어떤 세력도 대한민국의 응징을 각오하라는 뚜렷한 선언의 표명이 있어야 했다.

망명 후 소련인 주방장은 피자집을 열고 자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냈다. 그의 존재와 글은 지속적으로 미국인의 자긍심을 높여주었다.

우리는 정의감의 사람들이다. 자유를 갈망했던 사람들이다. 만주 벌판을 헤매어도, 전장의 포연 속에서도 죽음보다 자유를 얻고자 했다.

자유를 위해서 군사정권에 반대했다. 우리들 중 많은 사람들은 사실상 탈북자들이다. 자유를 찾아 남으로 향했다. 지금의 탈북자들보다 단지 수십 년 먼저일 뿐이다.

자유와 인권. 이것은 민족과 국가의 저력과 경쟁력을 높이는 길이다. 우리 외교관들에게도 국제무대에서 세계인들을 상대할 때 자긍심을 갖게 해주어야 한다.

탈북자 보호를 이야기할 수 있도록 해야 하고, 옳은 일은 옳다고 할 수 있게 해야 하며, 현실적인 일은 지혜를 발휘하여 풀어갈 수 있도록 지원하고 능력을 주어야 한다. 이제는 정부가 더욱더 일할 차례다. NGO들이 오랜만의 휴식을 가질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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