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정상회담에서 이산가족의 상봉 문제가 정치적 최우선 과제라면 남·북한 교역 활성화를 위한 산업 표준화 논의는 경제적 최우선 과제이다.

산업 표준을 남한에서는 ‘KS’라고 하고, 북한에서는 ‘CSK’라고 하는데, 공산품을 만드는 국가 규격을 말한다. 국가 규격을 만들면서 북한은 중국과 러시아의 규격을 모법(모법)으로 하고, 우리는 일본과 미국을 모법으로 하였기 때문에 근본적인 차이점이 생긴 것이다.

우리 TV를 북한에 제공한다고 해도 북한에서는 쓸 수가 없다. 우리나라는 NTSC 방식이고, 북한은 PAL 방식이기 때문이다. 또 컴퓨터를 무상으로 북한에 제공한다고 해도 북한에서는 쓰기가 어렵다. 자판의 배열이 우리와 다르기 때문이다.

쌀 한 가마니의 포장 단위도 다르고, 전기의 표준 전압, 기관차의 신호와 제어 방식 등 그 어느 것도 남·북한은 일치하지 않는다. 당장 통일이 되면 남·북한 철도가 연결되는 판문점 근처에서 기차를 바꿔 타는 일이 벌어질 판국이다.

이처럼 남·북한간 각종 산업과 관련된 표준화 작업은 시급하다. 통일은 물론, 당장 남·북한 경제협력 측면에서도 필요하다.

통일이 2010년에 이루어지면 10년 동안 부담해야 할 통일 비용은 2조 달러라는 조사 보고가 있다. 이 중 산업의 표준화에 필요한 비용은 2000억 달러로 추정된다. 아직은 남·북의 산업 격차가 심하고, 북한의 경우 아직 초보 단계이거나 시작도 하지 않은 산업이 많다. 만일 남·북이 산업 표준화에 합의한다면 통일 비용은 대폭 줄어들 수 있다. 북한 경제가 어떤 표준을 선택하기 이전이라면 합의는 더욱 쉬우리라 판단된다.

예를 들어 지금 남한의 컴퓨터 보급 대수는 1000만대 정도이고, 북한은 5000여 대에 불과하다. 따라서 지금 당장 자판을 통일하면 최악의 경우 남한에서 북한의 컴퓨터 5000대분의 교체 비용을 지불하면 될 정도로 비용이 적게 든다.

하지만 이것이 늦어져 북한에 몇 백만대의 컴퓨터가 보급된 후라면 이 비용은 천문학적으로 증가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남북정상회담에서 남북이산가족의 상봉과 동등한 가중치를 갖고 남·북한 산업 표준화 문제를 논의해야 하는 이유다.

물론 정상회담에서 1만여개나 되는 산업 표준을 논의하자는 것이 아니다. 지금부터 만드는 산업 표준만이라도 국제표준화기구(ISO)를 모법으로 하여 통일산업규격을 만들자는 남·북한 정상의 선언만으로도 충분하다.

가장 시급한 것은 남·북한 산업 규격을 교환하여 통일 방안을 연구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실무자들의 일이다. 북한의 제대로 된 산업 규격 하나 없이 통일을 준비한다는 것은 난센스이다.

동·서독의 통일이 기대했던 만큼 핑크빛 결과만 가져다 준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서 보듯 우리는 통일에 거는 기대만큼 철저한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특히 산업의 동질성을 확보한다는 측면에서 남·북한의 산업 표준화를 국가적 과제로 삼아야 할 것이다. 우리 기업들도 활성화될 남· 북한의 경협을 앞두고 적극적인 자세로 북한의 국가 규격을 점검하고 대책을 마련해야 하겠다.

/윤덕균 한양대 산업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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