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북어부 老母, 죽은 아들 대신 동생 만나 통곡

"나는 오늘 동생을 만나러 왔다. 선희(선자) 너를 만나러 왔다"

1968년 열다섯의 나이로 납북된 맏아들 박종임(50)씨가 이미 세상을 떠났다는 통보를 받고 10차 이산상봉에 참가한 윤영자(73) 할머니는 14일 단체상봉에서 아들 얘기를 꺼내기를 주저했다.

반세기 만에 만난 여동생 선희씨를 상대로 아들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를 묻고 싶었지만 일단은 참는 표정이었다.

개별상봉 등 시간이 아직은 남아 있는 만큼 차근차근 물어보는 게 낫다고 생각한 때문이라고 상봉장에 동행한 둘째아들 민천씨는 설명했다.

대신 윤 할머니는 동생 선희씨를 상대로 두 번이나 이산가족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기구한 운명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윤 할머니는 상봉장에 들어서자마자 선희씨를 끌어안은 채 "미안하다. 미안해. 내가 죄가 많다. 혼자서 어머니 아버지 모시고 어떻게 살았느냐. 네가 심청이다. 어떻게 다 만날꼬"라며 목놓아 통곡했다. 선희씨도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윤 할머니의 운명은 기구했다. 윤 할머니는 광복 직후 황해도 평산군에서 가족들과 함께 살다가 잠시 서울로 온 사이에 6.25전쟁이 터지면서 가족들과 영영 이별했다.

부산까지 내려가게된 윤 할머니는 부산 육군병원에서 일하던 중 결혼을 해 아들 종임씨를 낳았다. 하지만 남편이 하던 일마다 실패하면서 강원도 고성까지 가 남편이 고기잡이 배를 타는 것으로 연명하게 된다. 아들 종임씨 역시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한 채 배를 탔다.

운명의 1968년 7월.

가덕호를 타고 출항한 종임씨가 납북되면서 윤 할머니는 두 번 이산가족이 되는 비운을 맞았다. 납북선원 중 일부는 귀환했으나 종임씨 등 4명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공부도 시켜주고 한다니 종임이가 좋아하더라"는 귀환 선원의 전언이 마지막 소식이었다.

이후 윤 할머니의 인생은 '기약없는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납북자가족모임에 꾸준히 참석하면서 아들과 상봉을 기다려온 끝에 10차 상봉단 예비후보에 포함돼 아들의 생사를 확인하게되는 행운을 얻었으나 '사망'이란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듣게 됐다.

윤 할머니는 단체상봉 직전 기자들과 만나 "다른 사람들은 만나던데 내 아들은 '사망'이란 게 무슨 말이냐. 두만강 물이 마르고 한강물이 말라도 내 눈물은 마르지 않았다. 그런데 죽었다니 그걸 믿으란 말이냐"며 오열했다.

둘째 아들 민천씨는 "그냥 죽었다고만 하면 다냐"고 허탈해 했다./연합
저작권자 © 조선일보 동북아연구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