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 선생님하고 만날 일이 없습니다. 미안합니다.”

2001년 6월 중국 베이징의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 사무소에 진입, 세계 언론의 주목을 끌며 한국에 들어왔던 길수네 가족의 장길수(20)씨. 본명은 장창수다. 서울에 온 지 만 3년. 그는 인터뷰 요청을 휴대전화의 문자 메시지로 딱 잘라 거절했다. 할 수 없이 그가 다니는 컴퓨터 학원에 찾아가 겨우 만났다.

“처음 왔을 땐 어리벙벙해 마이크 갖다 대는 대로 인터뷰하고 여기저기 나갔지만 지금은 싫어요.” 못마땅하다는 표정이 얼굴에 역력했다.

매스컴의 스포트라이트 속에 곳곳에서 환영받았던 때와는 딴판이다. 인터뷰에 스스럼없이 응하고 카메라 앞에서도 아랑곳하지 않던 ‘스타 길수’가 아니었다. 활달했다던 그는 기가 많이 죽은 듯했다.

올 2월 서울의 정보산업고를 졸업한 뒤부턴 강연요청도 끊기고 기자도 찾지 않는다고 한다. 재외국민특별전형으로 연세대에 지원했다 고배를 마셨다.

1년 전 그는 형 창길(23)씨와 함께 독립했다. 용돈을 벌기 위해 신문배달, 막노동, 주유소일 등 온갖 아르바이트를 다 했다. 올 초엔 휴대전화 부품 공장에서 하루 12시간이 넘게 일하기도 했다.

야간 작업이 있을 땐 16~17시간씩 파김치가 될 때까지 일했다. 한 달에 80만~120만원씩 받았지만 너무 힘들어 석 달 만에 그만뒀다.

언론 인터뷰와 강연회 등에 나가 대접받고 쉽게 경제적 지원을 얻었던 예전의 ‘길수’는 없었다. 그는 “주유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해도 남한 애들은 시간당 3000~3500원을 받지만 북한 출신이란 걸 알면 2500원밖에 주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묻는 말에만 대답할 뿐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 두세 번을 물어야 겨우 대답하는 경우도 있었다. 터놓고 말은 하지 않지만 남한 사회와 언론에 심한 배신감 같은 것을 느끼는 것 같았다.

지난 3년 동안 ‘길수’와 ‘창수’ 사이를 오가며 많이 지친 듯했다. 학교 선생님들도 평상시엔 ‘창수’로 부르다가도 6·25기념행사나 통일박람회 때는 ‘길수’로 불렀다고 한다. 자신도 행사나 언론 인터뷰 땐 ‘길수’로 소개했다. 이곳 사람들이 보고 듣고 싶어하는 ‘역할 모델’을 잘 따랐던 것이다.

그러나 학교생활에서 그는 지각도 자주 하고 학교 규율을 이해하지 못해 반발심을 보이기도 했다. 그가 다녔던 고등학교는 통일시범학교여서 선생님들도 그가 웬만한 잘못을 해도 너그럽게 대해줬다고 한다.

그래도 그에게 남한 생활은 참 힘들었던 모양이다. 지난해 10월엔 학교에서 싸움으로 퇴학 직전까지 몰리는 고비를 맞기도 했다. 한 선생님은 “창수가 한때 ‘죽고 싶다’는 심정까지 가질 만큼 힘들어했던 걸 나중에 알게 됐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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