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대 총선― 참으로 ‘말의 타락’이 극에 달했던 선거였다. 그러나 몇 가지 중요한 감상 포인트를 드러낸 선거이기도 했다. 우선 특기할 것은 ‘북풍’이 별로 먹혀들지 않았다는 점이다.

선거 불과 3일 전에 몰아닥친 ‘북풍’은 집권측에 실로 천군만마 같은 원군이었다. 그러나 그것에도 불구하고 집권측은 일단 졌다. 집권측은 “그래도 그 덕택에 이만큼이라도 좁혀놓았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만큼 좁혀놓았는데도 18석씩이나 뒤졌다면 그 격차의 질(질)은 더 의미심장하다. 한마디로 유권자들은 “정상회담은 정상회담이고 선거는 선거다”라는 고도의 분별력을 발휘한 것이다. 이것은 유권자들의 높은 성숙도를 드러낸 것이고, 집권측이 앞으로 남·북 정상회담을 어떻게 관리해야 할 것인가를 말해준 유권자들의 엄중한 경고였다.

남한의 ‘국가’를 한사코 외면해온 북한을 일약 최고당국자간 대화의 장(장)으로 끌어낸 집권측의 노력은 물론 그 나름의 충분한 평가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것이고 국내정치는 국내정치다. ‘남·북’ ‘통일’ ‘대북(대북)’이 아무리 막중해도 그것을 국내정치게임의 어떤 지렛대로 활용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을 것이다.

국민은 이제 ‘7·4 남북공동성명’ 때처럼 마냥 순진하지만도 않고 무턱대고 들뜨지만도 않는, 대단히 영리하고 냉철한 국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국민은 신문·방송들이 며칠씩 ‘정상회담’으로 아무리 떡을 쳤어도 자신의 표심(표심)을 차분하게 따로 정리한 것이다.

또하나 중요한 포인트는 자민련의 몰락이다. 그만큼 국민은 “DJ 당(당)이냐 아니냐”에만 관심이 있었다는 뜻이겠다. 그리고 이번 총선의 핵심적인 쟁점 역시 바로 그 점이었다는 것이 입증된 셈이다.

JP의 텃밭으로 알려진 충청권까지 이 양자택일 대열에 합류했다는 것은 이번 총선의 가장 획기적인 사건 중 하나였다. “DJ냐 아니냐”라는 분명한 질문 앞에서 “예예, 글쎄요, 아니오…”라고 얼버무리는 JP식 선문답(선문답)이 마침내 벼랑 끝에 몰린 것이다.

이 같은 선거결과는 김대중 대통령에 대해 한 가지 중대한 암시를 던지고 있다. 한마디로 지난 2년반 같은 인위적이고 작위적인 다수파 공작은 실패했다는 사실이다. 야당의원 빼가기, 동진정책, TK 끌어들이기, 신당 급조하기, 포퓔리슴, 정명훈·황수관 같은 대중스타 활용하기… 등등이 별로 신통력을 발효하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면 김 대통령은 앞으로 또 그렇게 할 것인지, 아니면 다른 방법을 쓸 것인지 결정을 내려야 한다. 다른 방법이란 예컨대 다수파 야당을 ‘개혁대상’으로 치지 않고 협의대상으로 대접하는 길이다. 여기엔 물론 다수파 야당의 현명한 처신이 전제돼야 함은 물론이다.

이회창 총재와 야당이 만약 ‘승리’에 도취해 경솔하고 편협한 처신을 할 경우 김 대통령은 타협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회창 총재는 공천파동을 간신히 극복하기는 했으나 이제부터가 진짜 ‘정치력 테스트’ ‘인간됨 테스트’라 할 수 있다. 이회창 총재는 좀더 능소능대할 줄 알아야 하고 ‘협량’ 소리를 듣지 말아야 하겠다.

16대 국회의 과제는 결국 잔망궂은 ‘소인배 장난’으로 전락한 우리 정치를 가능한 한 ‘군자의 게임’으로 접근시키는 일이다. 잔머리 굴리기, 약점 뒤져 흔들어대기, 꼼수와 뒤통수 치기, 사도(사도)와 사술의 정치를 벗어나야 하는 것이다.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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