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경수로 건설 공사 현장에 파견된 1년6개월간 보고 겪은 북한 사람 이야기를 만화로 펴낸 오영진씨 /이진한기자 magnum91@chosun.com

“1년 반 동안 북한에 있으면서 딱 세번 휴가를 받았어요. 그때마다 만화 소재를 적은 메모를 돌돌 말아 양말 안쪽에 숨겼죠. 북한 당국은 남쪽으로 정보를 반출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거든요.”

목화씨를 붓두껍에 숨겨 들여온 문익점의 일화가 새삼 연상된다. ‘테러리스트’라는 작품으로 알려진 직업 만화가이자 한국전력 도서(島嶼)전력팀 직원인 오영진(34)씨. 그는 2000년 3월부터 이듬해 8월까지 북한 경수로 건설 공사를 위해 함경남도의 금호 원자력 건설본부에 파견됐다.

숨겨온 쪽지들은 이번에 ‘남쪽손님’과 ‘빗장열기’(길찾기 출판사)라는 두 권의 만화로 태어났다. 평범한 한국 젊은이가 처자식을 두고 548일간 북한에 체류하며 보고 느낀 북한 사람들 삶의 기록이다.

“그냥 그곳 사람들의 삶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친북이니 반북이니 제 입장을 정할 만큼 북한 동포에 대해 아는 것도 없었고요.” 가장 마음을 썼던 것은 북한의 경제 사정이다. “우리가 흔히 예상하던 대로예요. 베이징에서 북한으로 들어가는 고려항공기는 한여름인데도 좌석마다 부채를 꽂아 놨더군요.

이륙도 하기 전에 승무원들이 물수건과 사탕을 나눠주기에 ‘벌써 기내식인가?’하며 의아해 했는데, 금방 물수건의 용도를 알게 됐습니다. 부채만으로는 연신 흐르는 땀방울을 닦아낼 수 없으니까요.”


◇펼치면 만두나 떡을 담는 그릇이 되는 접이식 주방기구를 소형 레이더와 위성안테나로 오해한 북한 세관원들.

사회주의 체제하의 경직된 태도와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대한 금기가 만들어 내는 독특한 풍경도 보여준다. 펼치면 찜통용 받침 접시가 되는 철제 주방기기를 본 북측 세관원이 “이게 무슨 위성통신 장비냐”며 생떼를 쓰는 바람에 곤욕을 치르고, 우체국에서 “어, 김정일 우표도 있네”라고 했다가 “경애하는 장군님 호칭이 그게 뭐냐”는 직원들의 거친 항의도 받았다.

낮은 생산성도 지적한다. “내 임무는 석고보드 나르기이므로 나사못 가져오란 지시는 따를 수 없다는 말에 어이없었죠.” 그의 만화 속에는 그러나 극히 인간적인 모습들이 등장한다.

우리 쪽에서 제공하는 점심을 배불리 먹고는 어쩔 수 없이 잠에 빠져버리는 노동자들에겐 측은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면서, 파견직원들과 이들의 자동차, 물건들을 싸잡아 ‘남조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 어린아이조차 “미제 앞잡이” 운운하며 외면할 땐 분단이 심어준 적개심에 안타까워 한다.

그러나 지금 한국에선 누릴 수 없는 것들을 그곳에선 실컷 만났다. 뿌듯하고 행복했다. 짓궂은 남쪽 손님들 앞에서도 좀처럼 싫은 표정을 하지 않는 여성 직원들, 그 맘씨에 반해버린 총각들도 많았다.

함흥에서 현장까지 100㎞ 남짓한 거리를 5시간 걸려 들어가는 불편함도, 어린시절 시골에서 본 기억이 있던 ‘쏟아지는 은하수’의 장관 앞에서 깨끗이 잊는다.

가격을 정하지 않은 채 덮어놓고 음식부터 차려내는 순박함과 경수로 건설 현장에서 땀 흘리는 남쪽 노동자들을 위해 몰래 삶은 감자를 갖다 놓는 북한 주민의 인정에 감복하고, 우리가 놓아준 아스팔트 도로를 매일같이 비로 쓰는 정성에 숙연해진다.

그래서 처음 무덤덤했던 남한 사람들은 배가 고파 길에 누워버린 소와 먹은 게 없어 물 같은 똥을 싸는 소까지도 측은해 하게 된다.

오씨는 “그들과 접촉할수록 북한 사람들 이야기를 꼭 남겨야겠다는 확신이 생겼다”며 “호기심 반 망설임 반으로 몸을 싣고 떠났던 북한에서 그동안 잊고 살았던 우리의 또 다른 자화상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김태훈기자 scoop87@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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