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국방부 폴 울포위츠 부장관이 주한미군의 이라크 차출이 일시적 이동이 아닌 전반적인 주한미군 감축의 시작임을 시사했다.

미국발 보도를 종합해 보더라도 이제 문제는 주한미군 3600명이 잠시 어디로 가느냐 하는 차원을 넘어선 주한미군의 성격과 기능의 변화라는 것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정부는 이 근본적인 변화를 어떻게 보며 어떻게 대처해 나갈지 분명히 제시해야 한다.

이 정부가 작년에 내놓은 자주국방구상의 핵심은 ‘주한미군과 함께하는 자주국방’이었고, 미국이 한국을 ‘신뢰하는 혈맹’으로 본다는 전제 아래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대전제’부터 무너져 내리고 있다.

미국에서는 물론이고 외교·국방장관이나 주미(駐美)대사를 지낸 우리 전문가들 상당수도 이번 파견이 미군의 전면 재조정 계획이나 한·미동맹 재설정의 일환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그럼에도 정부는 이런 진단과 우려에 현실적 대비책을 내놓지도 않은 채 국민들이 느끼는 불안감을 ‘심리적 미군 의존증’이라고 남의 일처럼 비하(卑下)하고 있다.

지금의 상황은 ‘한·미동맹의 어떤 부분이 변하느냐, 그 변화가 본질적인 것이냐’ ‘미국의 전략 변화가 안보에 미칠 영향은 무엇이냐’ 하는 근본적 의문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이 상황에서 ‘문제없다’라든가 ‘국민의 미군 의존감이 문제’라는 식의 무책임하고 방자한 발언을 되풀이하는 것은 정부가 취할 도리가 아니다.

주한미군과 한반도 안보의 변화 방향에 대한 대응책과 함께, 이 정부가 한·미관계와 안보를 걱정하는 소리를 막는 데 곧잘 동원해 온 ‘자주국방’이란 구호를 어떻게 구체화할 것인가를 내놓아야 한다.

현재 국민이 느끼는 불안과 혼란은 정부가 이 상황에 대해 아무런 유권(有權)해석도 내놓지 않기 때문이다. 이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한 신뢰성이 지난 1년 줄곧 문제가 되어왔다.

이제 그 신뢰성의 위기가 국민의 생명과 국가의 미래에 직결되는 외교·안보 영역으로까지 번져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데도 그저 “안보에는 문제가 없다”고 구렁이 담 넘어가는 식으로 때우려 한다면 이것은 정부의 태업(怠業)이라 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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