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시, 북한의 '핵동결 협상안'거부…6자회담 연내 어려울듯


미국과 북한이 8~9일 연내 6자회담 개최를 위한 막바지 물밑 협상단계에서 공개적 설전(舌戰)을 벌였다. 그동안 중국과 한국·일본·러시아 등의 중재를 뒤편에서 지켜보던 양 당사국이 마침내 자신들의 속셈을 드러낸 것이다.

북한 외무성은 8일 “미국은 지금 ‘서면 안전담보’라는 문서장 하나로 우리의 핵 억제력을 송두리째 들어내보자고 하는 것 같다”면서, 미국에 대해 이른바 첫 단계 행동조치를 요구했다. 북한은 그 조치의 내용에 대해 “우리가 핵활동을 동결하는 대신 미국에 의한 테러지원국 명단 해제 정치·경제·군사적 제재와 봉쇄 철회 미국과 주변국에 의한 중유·전력 등 에너지 지원과 같은 대응조치가 취해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미국의 부시 대통령은 9일 워싱턴을 방문 중인 원자바오(溫家寶) 중국 총리와 만난 뒤 “우리의 목표는 (북한) 핵프로그램 동결이 아니다”면서 “목표는 핵무기 프로그램을 입증할 수 있고 돌이킬 수 없는 방식으로 폐기하는 것”이라고 못을 박았다. 뒤이어 나온 국무부 리처드 바우처(Boucher) 대변인의 정례 브리핑은 최근 보기 드물게 북한에 대한 불만을 그대로 담고 있다.

바우처는 “북한이 회담에 앞서 자신들이 요구하는 긴 요구목록을 만들기 시작할 때가 아니다”면서, 그 같은 전제조건을 제기하지 말라고 촉구했다. 그는 북한 외무성의 8일 성명에 대해 “그들이 취해야 할 태도가 아니다”라고 비난하면서, 미국은 북핵 현안 해결의 전제조건으로 어떠한 보상이나 대가를 제공하지 않는다고 거듭 강조했다.

양국의 이 같은 설전을 통해 드러난 입장차는 작지 않다. 요컨대, 서로 상대방에 대해 요구하는 것은 많고, 줄 것은 많지 않다. 미국은 우선 북한의 핵 폐기 조치 가시화와 안전보장을 맞바꾸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지만, 북한은 핵 폐기까지 가는 길목마다 미국에 대한 구체적 요구사항을 준비해 놓고 있다. 한국이 그동안 ‘조율된 조치(coordinated steps)’ 등 조어(造語)를 통해 접점을 만들려고 노력했으나, 양국은 원점의 대치 상태로 돌아간 꼴이다.

양국이 막바지 협상을 앞두고 줄다기리를 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이 상태라면 6자회담이 연내 열리기는 사실상 어려워진 것으로 보인다. 원자바오 총리도 이날 부시 대통령에게 6자회담이 열리기는 시기상조라는 입장을 밝혔다고 백악관의 고위 당국자는 말했다. 더 나아가 내년 초 6자회담이 열릴 지, 열린다고 해서 성과를 낼 수 있을지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론이 커질 수도 있다.

하지만 미국과 북한은 아직 회담의 필요성 자체를 부인하고 있는 상황은 아니다. 바우처 대변인은 “미국은 언제든지 회담에 임할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고, 북한도 “뉴욕 접촉선을 통해 6자회담을 12월 초 재개하자는 입장을 전한 바 있다”고 말했다. 양국은 2차 6자회담이 궁지에 몰린 데 대해 서로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
/ 워싱턴=주용중특파원 midway@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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