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과 민중-민족 이름위에 음악혼 불태운 천재 작곡가

"자유 독립 우리 나라, 깃발을 날려라" 도적처럼 몰래 찾아온 해방 앞에서 우리 민족은 '건국 행진곡'을 소리 높여 불렀다. 해방의 감격을 노래하고 외치는 소리의 축제였다. 음악사적으로는 민족음악의 기틀을 마련하는 순간이었다.

이 노래의 작곡가 김순남. 그 역시 예술인들의 '나라만들기' 열망이 정치적 활동으로 분출하고 결국 월북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밟게 된다. 그는 해방공간의 음악분야에서 실천적 좌파운동의 중심에 있었고, 임화의 시에 그가 곡을 부친 '인민항쟁가'는 그 주제가가 되었다.

노래 잘하고 피아노 잘 치기로 소문난 이 낙원동 '화장품 집 아이'는 운명적으로 임화의 이념적 동지이자 창작의 친구가 되었다.

같은 서울 출신의 모던 보이로, 작은 키에 술 잘하기로 이름난 이들은 음악과 문학의 재능을 서로 떠받쳐주면서 해방공간의 나라만들기 이념을 정서적으로 고양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즈음 김순남이 작곡한 '해방의 노래'와 '농민가'는 사람들의 심장을 뛰게 했고, 김소월의 시에 부친 '산유화'는 지친 일상을 어루만져 주었다.

김순남은 일본 유학시절 사숙했던 하라 타로나, 바르톡, 쇼스타코비치, 프로코피예프 등의 음악가들로부터 민족음악의 가치를 깨닫고 민족양식을 현대적으로 변용하는 방식을 배웠다. 그는 뱃노래 가락이나 상여꾼의 노래 등에서 차용한 전통가락을 치열하면서도 역동적인 가사에 실어보냄으로써 혁명적 송가를 만들곤 했다. 노랫말에 대한 그의 뛰어난 문학적 감각도 작용했다.

김순남에게는 장인 특유의 기질적 특성이 존재했다. 그는 해방공간에서 음악의 정치적 투쟁과 계급이론화에 반대했고, 이를 역선전하는 우익 음악단체에도 비판적 입장을 견지했다. 그는 음악 본연의 독자성과 전문성을 중시했고 이를 구체화 하고자 했다. 그의 이러한 입장은 제도권 음악인들로부터 외면당하는 이유가 됐다.

조선에서 가장 위대한 예술가로 김순남을 평가한 미군정 음악고문관 일라이 헤이모위츠는 "진정한 창조적 천재에 대해 취하는 전단이나 어린애 같은 차별, 박해는 국민문화의 파멸과 위축을 빚어낼 뿐"이라고 개탄했다.

1947년 좌익운동이 완전히 비합법화 되자 인민항쟁가로 대중을 선도했고, 남로당원이었고, 민전위원, 조선음악가동맹 작곡부장이었던 김순남에게 체포령이 내려진다. 그러나 그에게 월북은 사상적 신념에 따른 비장한 결행이라기 보다는 잠깐의 '외출'이라는 인상을 준다.

그를 떠나보내는 환송회가 축제 분위기였다는 기록도 보인다. 그는 "나 내일 이북간다"는 말을 남기고 지인 4명과 함께 서울을 떠났다.

김순남은 '자장가'에서 "새봄이 돌아오면 아버지도 온단다"라고 썼지만, 영원히 지키지 못할 약속이 되고 말았다. 체포령 속에서 해방둥이 딸을 그리며 영혼에서 샘솟는 부성애를 4 곡의 '자장가'에 쏟아 부은 그였다.

그는 박헌영을 따라 1948년 여름 해주에 정착한 후, 평양음악학교 교수이자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며 헌법위원, 역사연구보존위원이 되었다. 대동강을 끼고 있는 모란봉 공원 앞의 2층 집에서 평양생활을 시작했다. 이 때의 제자였던 비목의 작곡가 장일남은 김순남의 '남'자를 자신의 맨끝 이름으로 바꾸었을 정도였다. 김순남에 대한 당시 북한 사람들의 존경은 대단해 그를 '악성'의 위치에 올려 놓았다.

1949년 9월 소련 10월혁명 기념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소련을 방문한 김순남은 쇼스타코비치를 만나는 감격을 누렸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1952년 여름 모스크바 유학을 떠난다.

작곡가 김순남의 이상은 민족음악을 현대음악의 보편성의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데 있었다. 그러나 그의 유학생활은 얼마 가지 못했다. 당시 사상문예투쟁이 본격화되면서 북한 음악계도 숙청의 폭풍을 예감하고 있었다. 1952년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 5차 전원회의는 자연주의, 형식주의 등 부르조아 문학 예술의 낡은 사상 잔재를 비판하고 외국유학생들에 대한 귀환조치를 내렸다. 김순남도 휴학계를 내고 1953년 귀국한다. 1954년 경부터 당조직의 사상 투쟁 강화와 주체 확립을 위한 반종파투쟁이 강화되면서 남로당계 예술인들, 특히 김순남에 대한 치열한 비판이 시작된다.

리히림은 ‘인민항쟁가’가 베토벤처럼 6도 이상의 비약을 쓰고 있어서 부르조아적 방법이라고 비판한다. 이후 김순남의 모든 직함과 창작권리는 박탈당한다. 그는 1960년대 초반, 평양을 떠나 함남 신포에서 송진을 달이거나 주물공장에서 노동을 하면서 ‘돌아라 사랑하는 기대야’ 등을 작곡했다. 이때의 체험은 ‘현실 속에서 배운 것’(조선음악. 64년4월)에 게재돼 있고 이무렵 그의 복권이 이루어진 듯하다.

김순남의 말년은 무척 고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60년대 말 폐병을 얻었고 전염성 폐결핵으로 악화되면서 이후 창작활동은 거의 하지 못했던 듯하다. 요양과 귀향이 되풀이 되었고, 만년에는 문예창작지침과 개인의 창작생활에서 오는 갈등을 해소하지 못해 많은 내적 고통을 얻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1983년경 신포기업소에서 삶을 마감한 것으로 추측되지만 정확한 연대와 시기는 확인되지 않는다.

현실과 민중, 민족의 이름 위에 음악 혼을 불태운 이 걸출한 음악가의 일생에는 빛나는 천재성과 개인적 선택(월북)에 내재한 비극성이 변주곡처럼 울리고 있다.

(조영복 문학평론가 qbread@hananet.net)

김순남(1917∼1983?) 누구인가 --------------------------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였던 김순남은 서울 낙원동에서 태어나 경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 1938년 동경고등음악학원 본과 작곡부에 입학했다. 거기서 일본 프롤레타리아 음악의 정신적 지주격인 하라 타로를 만나 음악을 민중의 삶 속에서 찾고자 하는 사상적 영향을 깊게 받는다.

1942년 동경제국고등음악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했다. 해방 직후 조선음악건설본부를 결성, 첫 해방가요 ‘건국행진곡’을 작곡했으며, 일제 잔재 청산과 진보적 민족음악 건설을 주장했다. 그의 이름과 작품은 월북 때문에 남한에서 오랫동안 잊혀졌으나 1988년 해금조치로 빛을 보았다.

김순남의 딸인 성우 김세원(56)씨는 "아버지는 이상을 좇았던 예술가였으며 이념적으로나 음악적으로 너무 앞서 갔다”면서 “북한으로 간 아버지가 이상의 좌절을 겪을 때 얼마나 고독했을까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저작권자 © 조선일보 동북아연구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