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玄浩/논설위원

전향(轉向) 문제를 놓고 송두율씨가 곤혹스러워하는 것은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조국’이 너무 많기 때문일 것이다. 태어난 조국이지만 국적을 포기하고 비판의 대상으로 삼아 온 한국, 노동당 가입으로 선택을 분명히 한 이념의 조국인 북한, 그리고 법률적 조국인 독일, 이 셋의 경계지대에 그는 지금 서 있다.

조국이 셋이나 된다는 사실은 송씨의 ‘행복’이다. 일제시대 사회주의 계급운동에서 전향한 지식인들이 돌아갈 조국이 없어 대부분 친일로 기울어질 수밖에 없었던 비극을 생각한다면 송씨는 행복을 만끽해도 좋을 것이다. 그에게는 선택의 자유가 활짝 열려있고, 누구도 그 선택을 강요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제시대 대표적 지식인이자 문인이었던 회월(懷月) 박영희(朴英熙)는 1934년 좌파 문학운동을 주도한 카프를 탈퇴하면서 “단지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이며, 상실한 것은 예술 자신”이라는 유명한 전향 선언문을 남겼다.

“고행의 순례는 끝나고 예술의 전당에 도착하였으며 창작의 사원의 종소리를 듣게 됐다”고 순수문학으로의 회귀를 기뻐한 회월이었지만 이후 변절과 친일이라는 굴레를 벗지 못한 채 고독과 절망의 방에 자신을 유폐시킬 수밖에 없었고 끝내 6·25 때 납북당하고 만다.

송씨의 전향 문제에서는 이런 역사적 비장감마저 탈색돼 버리고 사법처리의 수위 조절용이라는 메마름만 남게 됐다. 그가 귀국 후에라도 뻔뻔스런 거짓말과 교묘한 언변 대신에 솔직한 고백과 처절한 반성을 택했더라면 언젠가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시대의 희생자’로 거듭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송씨가 만약 북한에 대한 자신의 ‘내재적 접근론’을 고집하면서 전향을 망설인다면 한때 같은 내재적 접근론자라고 할 수 있었던 김영환씨의 명쾌한 북한 관찰법과 자기성찰의 깊이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강철 서신’으로 대학가 주사파를 이끌었던 김씨는 송씨와 같은 때인 91년 5월 김일성과 북한의 주체사상 이론가들을 만나 보고는 미련없이 전향을 택했다.

김영환씨의 내재적 관찰은 주체사상이 정작 북한 내에서 박제화돼 버린 사실을 쉽게 간파했다. 또 그의 시선은 북한의 지배층을 넘어 인민에까지 닿아 있었다. 이후 그가 선택한 것은 북한의 지배층과 그들의 지배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그것의 피해자인 인민들의 삶과 인권이었다.

식민지시대와 분단시대를 거치면서 전향이라는 단어에는 변절 배신 훼절 등의 온갖 부정적 의미들이 덧씌워졌다. 여기에는 대부분의 전향이 생존을 위협하는 완력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역사적 사실과 지조를 중시하는 우리의 선비적 전통이 배어 있을 것이다.

송씨 역시 전향을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려는 성실함’에 대한 배신으로 여기면서 이 말에 자기굴욕감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제 우리사회도 ‘자기성찰에 의한 자발적 전향’과 ‘권력에 의한 강제적 전향’을 구분해 지식인의 전향 문제를 윤리의 굴레에서 해방시켜줄 단계에 이르렀다고 본다.

송씨 스스로 “어떤 주의나 주장을 현실에서 구현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으면서 지금까지 견지해 온 관점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시정하는 태도는 너무나 당연하다”(「경계인의 사색」 59쪽)고 말하지 않았는가.

송씨가 자신을 정녕 ‘거물 간첩’으로 여긴다면 ‘비전향 장기수’로 남아 언젠가 북으로 개선해 노동당 정치국 정위원으로 승진하고 자신의 영웅적 투쟁을 ‘조선전사’에 남기는 것도 하나의 선택이 될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지식인으로 자처한다면 선택은 달라야 한다. 사법적 차원의 전향 여부와는 별개로 자신의 사상적 지향을 명쾌하게 밝히는 지식인으로서의 전향이 이루어져야 한다.

송씨가 내면의 깊은 고뇌와 성찰로써 지적(知的) 전향을 이루고 그것을 계기로 한국의 지식인 사회가 전향의 문제에서 좀더 자유로워질 수 있다면 송두율 사건은 그나마 하나의 긍정적 측면을 갖게 될 것이다. / hhkim@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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