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설명: 하교길에서 책을 보는 여학생들.
‘빨간머리 앤’ ‘몽테크리스토 백작’ ‘셰익스피어 이야기’.

북한의 청소년들이 밤을 새가며 읽는 세계 명작들이다. 요즘은 경제난으로 책 구하기가 많이 어려워졌지만, 웬만한 북한 청년들은 학창시절 세계 명작에 빠져들었던 추억을 잊지 못한다.

청소년은 물론 일반인들에게 인기 있는 책들은 ‘셜록 홈스’ ‘루빵(루팡) 이야기’ ‘레 미제라블’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부활’ 등이다. 어린이들에게는 ‘알리바바와 40명의 도적’ ‘톰소여의 모험’ ‘걸리버 여행기’ ‘톰아저씨의 집’ 등이 단연 인기다. 각 나라별로 민속문화와 전설 등을 소개한 ‘세계 민화집’도 청소년들의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빠지지 않는다.

세계문학서적들은 원문 그대로 번역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번역도 예술”이라는 김정일의 방침에 따라 원문보다 더욱 멋지게 번역된 책도 있다. 그러나 외국 작품에는 책 머리나 말미에 ‘평가’를 붙이고 있는데, “이 작품에는 계급성이 없다”는 등 독자들이 읽을 때 ‘유의해야’ 할 사항들을 담고 있다.

‘셜록 홈스’와 ‘루팡 이야기’는 인민보안성(경찰) 요원들의 ‘참고 책(해당분야의 사람들만 보는 책)’으로 나왔으나 워낙 인기가 좋아 일반에도 퍼져 나가게 됐다. 이건국(26·98년 탈북) 씨는 두 소설은 자신이 중고등학교 때 처음으로 밤을 새가며 읽은 책이라고 했다.

셜록 홈스와 루팡, 몽테크리스토는 많은 북한주민의 별명으로 애용되기도 했다. 도둑을 잘 잡는 인민보안원에게는 ‘셜록 홈스’, 보안원을 잘 따돌리는 사람에게는 ‘루팡’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수업시간에 세계명작을 몰래 읽다가 선생님에게 들켜 매를 맞거나 책을 빼앗겨 눈물을 흘리며 책을 찾으려고 선생님을 찾아 다니는 학생들도 적지 않았다. 학생들은 세계 명작을 읽으면서 또 다른 세계에 대한 상상과 호기심으로 가득차게 된다. 줄거리가 고정적인 북한의 소설과는 달리 전혀 다른 세계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에서 세계명작을 접하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책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이다. 도·시·군의 도서관에 가면 빌려 볼 수 있지만 일주일을 기다려도 차례 돌아오기가 쉽지 않다. 인기있는 책은 한 달도 더 기다려야 한다. 그나마 하도 많은 손길을 거쳐 보풀이 일어 글자가 잘 안 보이는 책을 눈을 비벼 가며 읽어야 한다. 세계명작을 서점에서 팔기도 하는데 일반인들에게는 책값이 부담스러울 뿐 아니라 차례도 잘 돌아오지 않는다. 새 책이 나오면 서점에서 대개 당 간부들에게 먼저 연락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당간부 자녀들 주위에는 책을 빌려 보려는 친구들이 줄을 선다.

문학 전공자나 독서광들은 ‘100부 도서(100 부만 찍는 책)’에 눈독을 들인다. 이 책들은 중앙당 고위간부나 문학인들의 참고용으로 비밀도서로 분류되는 것이어서 일반에 유출될 경우 문제가 심각해진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데카메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뿌리(알렉스 헤일리 작)’ 등이다. 이런 책을 빌려 보려는 상당한 ‘비용’과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사회주의권 작품으로는 러시아의 혁명소설 ‘강철은 어떻게 단련 되었는가’가 단연 인기다. 북한의 고등학교 졸업반이나 대학 시절에 한번씩은 거의 모두 읽어 보는 소설인데 주인공의 사랑이야기가 리얼하게 묘사된 대목이 특히 인기를 끌었다. 러시아의 혁명소설 가운데 ‘고리키의 어머니’ ‘아버지와 아들’ 등도 많이 읽힌다.

북한 소설 가운데 청소년들이 재미있게 읽는 것으로는 김일성의 청소년 시절을 그린 ‘동트는 압록강(월북작가 강효순 작)’을 꼽을 수 있는데 이런 책은 학생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필수 도서로 지정해 놓고 있다.

북한 청소년들의 외국서적 독서 열풍은 경제난이 악화된 1992년경부터 사그라들기 시작했다고 탈북인들은 전한다. 김정범(20·99년 11월 입국)씨는 “지방에서는 책을 구경하기도 어렵게 됐고, 평양에서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낡은 책들이 대부분이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요즘 한국으로 온 북한 청소년 가운데 외국 명작을 읽었다는 학생은 드물다.

북한은 1965년경 수정주의 바람을 차단하기 위해 서방 작품은 물론 러시아 소설까지도 금지조치를 취했다. 그러다가 1985년 김일성의 지시로 ‘자본주의 문학’을 제외한 세계고전문학이나 민속문화, 세계아동문학선집 등을 번역 출판하게 됐다. 여기에는 김일성과 친분이 깊었던 독일의 여류작가 루이제 린저의 영향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북한을 자주 방문했던 린저가 김일성에게 “북한의 젊은이들이 기본적인 세계문학도 몰라서는 곤란하다”고 충고했다는 것이다. 이어 1989년 평양에서 세계청년학생축전을 열면서 북한 청년들이 기본적인 국제 상식을 갖추어야 할 필요성이 제기돼 김정일의 지시로 세계문학작품이 대거 소개됐다고 북한 사람들은 알고 있다.

/강철환기자 nkch@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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