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운사 고랑으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막걸리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오히려 남았습디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디다.’

미당 서정주의 ‘선운사 동구’는 이렇게 한 작품이지만 그 독해의 종류는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한 번도 그곳을 방문한 적이 없는 사람과 즐겨 선운사를 찾는 사람의 감상이 다른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봄에 찾은 사람과 가을에 찾은 사람, 거기서 새 사람을 만난 사람과 오래 사귀었던 연인을 떠나보낸 사람의 느낌이 같을 수 없다.

▶글로 하는 예술 중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게 시라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오해의 위험은 의학과 같은 과학분야에서도 발생한다.

“아랫배 쪽이 싸하면서 욱신욱신 하는 게 면종류를 먹고 체했을 때와 비슷한데요”라고 증상을 호소하는 환자의 말을 그 어떤 노련한 의사라고 해서 완벽하게 느끼며 파악할 수 있을까? 이처럼 마음의 아픔은 말할 것도 없고 신체적인 고통 또한 100% 남김 없이 남에게 전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인지 모른다.

▶자신들의 전공분야를 개별 과학분야에 다 빼앗기고 하루아침에 학문의 제왕에서 쫓겨난, 리어왕 신세가 된 20세기 철학이 새 먹이를 발견하고서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아픔과 같은 사적인 언어(private language)를 타인에게 정확히 전달할 수 있는가’라는 다소 생뚱한 질문을 놓고 20세기 후반 콰인 같은 세계적인 분석철학자들이 격론을 벌였다. 그러면서 그들은 ‘(사람들간의) 완전번역은 가능한가’라는 상당히 그럴 듯한 철학적 물음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한국어문교열기자협회와 민주당 이미경 의원이 공동으로 북한의 초중고 교과서를 조사한 결과 이질화의 정도가 더욱 심화돼 번역 없이는 무슨 말인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수준이라고 한다.

하긴 ‘제형에서 두 옆변의 가운뎃점을 맺은 선분을 제형의 중간선이라고 부른다(사다리꼴에서 두 측변의 이등분점을 잇는 선분을 사다리꼴의 중간선이라고 부른다)’쯤 되면 남한에서 수학경시대회 수상자라도 알 길이 없다. 완전번역은커녕 완전단절을 향해 남북이 함께 달려가고 있는 형국이다.

▶이미 50년 이상 따로 살았으니 ‘완전번역’ 같은 것은 바라지도 않는다. 그러나 말이 통하지 않으면 마음의 소통은 그만큼 더 멀어질 것이다. 마음을 소통시키는 데는 문학만한게 없다.

그쪽의 작가들이 현단계 북한에서 한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어떻게 문학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는지 궁금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런 책이 있다면 당장이라도 구해서 읽어보련만. 북핵(北核) 국면에서 너무 한가한 소리를 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李翰雨논설위원 hwle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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