宋虎根
/서울대 교수·사회학

죽음 앞에 비정한 자는 없다. 재벌 총수의 자살이 던진 파문이 국민들의 마음을 헤집고 있는 것이다. 돈도 되지 않는 ‘민족 사업’에 자본금을 탕진한 것도 그러려니와, 최선의 돌파구로 투신(投身)을 택하지 않을 수 없었던 숨겨진 정황의 드라마가 냉정한 판단을 자주 흩트리기 때문이다.

정몽헌 회장의 죽음은 정치와 법, 명분과 원칙, 꿈과 현실, 그리고 배려와 합리 사의의 경계에서 아찔한 춤을 추는 한국사회의 모습을 절망적으로 비춰주었다. 막대한 공적 자금으로 연명해온 현대아산호(?)가 화려했던 국책사업의 비밀스런 시행자로 간택되었던 순간부터 절망의 늪을 향해 출항했었음을 눈치 챈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그것에 국민들은 민족화해의 꿈을 실어 보냈으며, 순안비행장에서의 역사적 상봉에 눈물겨워했다. 그리고 6·15공동선언이라는 역사적 작품을 만들어낸 배경에서 불가항력적으로 보이는 뒷거래가 낱낱이 파헤쳐지는 동안 파산의 어두운 그림자가 그를 짓누르고 급기야는 투신자살로 내쳤던 것이다.

나는 여기서 정경유착이라는 낡은 폐습과 재벌을 대표하는 ‘현대’의 전략적 실패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정 회장의 장례식에 속죄하려는 듯 모여든 정치인들이 한결같이 내뱉는 면피용 발언들, 예를 들면 남북경협은 역사적 사업이라든가, 그것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지속되어야 한다는 따위의 하나마나한 말의 진위를 확인하려는 것은 더욱 아니다.

그의 죽음에 어딘가 가위눌린 듯 답답해오는 심정이, 저 순진무구했던 국민들의 민족화해를 향한 꿈과 기대가 실정법의 합리적이고 명료한 칼날에 뭉텅뭉텅 베어져 나갈 때 느꼈던 두려움과 동류이며, 실정법의 심판을 받아야 할 만큼 개혁정치의 열망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린 신·구 정치권의 무능력과 상통한다는 점을 확인할 때의 절망 같은 것 말이다.

정치는 법을 만드는 행위인데, 법은 태어나자마자 정치를 규제하기 시작한다. 6·15공동선언은 엄격히 말하면 초법적 통치행위의 영역에 놓여 있지만, 그것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은 법의 제재를 받아야 한다. 남북화해를 향한 일련의 행위는 정치와 법의 경계를 무시로 넘나들었던 것의 열매였다.

결과로만 해석하면, 그것은 민족사에 새로운 장을 여는 행위였으며, 미래의 길을 여는 혁신적 선택이었다. 거기에 아무것도 몰랐던 국민들의 열렬한 환호와 열광과 기대가 뒤섞였다. 그런데 그것은 불법의 동산 위에 핀 꽃이었다. 그렇다면, 불법을 파헤치는 투시경을 어디까지 들이댈 것인가가 문제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특검법의 근거는 명확한데, 남북화해 정치의 정신과 국민적 기대를 어떻게 살려나갈 것인가는 정치권의 몫이었다.

특검법으로 단죄된 실무자들을 옹호할 마음은 추호도 없다. 다만, 6·15공동선언을 창출한 국민적 염원은 특검법이 작동하는 영역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일련의 행위를 낱낱이 분해하여 단죄할 것들을 가려내는 사이에 중요한 가치들이 훼손되고 유실될 가능성을 고민하지 않은 채 정치권은 법과 원칙이라는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운 편리한 수단에 몸을 숨겼다.

그것은 정치가 아니다. ‘열정’을 ‘이해관계’로, 이해관계를 관리하는 ‘합리적 수단’으로 대체해버린 현실정치의 원칙주의가 정 회장의 목을 죄었고, 동시에 국민의 염원도 출구를 찾지 못한 채 질식할 것 같은 상태가 된 것이다.

문제는 정 회장의 죽음으로 빚어진 집단심리의 질식 상태를 정치권이 어떻게 풀어주는가이다. 철저하게 파괴한 이라크에서 대량살상무기가 찾아지지 않는다고 부시, 체니, 럼즈펠드를 단죄하지는 않는다. 단죄하기는커녕 미국의 자존심을 지켜준 위대한 통치행위로 존경받는 게 미국의 정치다.

부시의 대이라크 전쟁은 의회의 인준과정을 거쳤다거나 9·11테러 같은 대참사가 전제되었다는 중대한 차이점을 간과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대의명분에 무엇이 도움이 되는지, 국민들의 염원에 무엇이 더 보탬이 되는지를 가려내는 성찰적 담론이 없는 한국정치의 소심함이 정 회장의 죽음에서 읽혀지는 것이다.

지난 두 차례의 민선정부처럼 혁신을 외치는 집권세력이 정치와 법의 미묘한 경계를 직시하지 못하면 개혁정치의 열정과 여지마저 싹둑싹둑 잘려 나갈 것임을 정 회장의 죽음이 비극적으로 보여준다.
저작권자 © 조선일보 동북아연구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