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셔레이드(charade)’라는 제스처게임이 있다. 한 사람이 몸동작만으로 무언가를 묘사하면 나머지 사람들은 가장 상징적인 몸짓에서 정답의 단서를 찾아내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맞히는 게임이다.

최근 북한의 외교적 몸짓이 대단히 부산하다. 적대관계에 있던 미국과 고위급회담을 준비 중이고 일본과 7년 반만에 수교협상을 재개했다. 전통적 우방이었던 중국, 러시아와의 관계 복원도 서두르고 있다. 유럽연합, 캐나다, 호주, 필리핀 등 서방 중견국가들과의 접촉도 활발하여 지난 1월 G7국가 중 최초로 이탈리아와 수교하였다.

이렇게 분주한 평양의 외교적 몸짓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북한의 최근 행보는 일단 지난 10여년간 스스로 선택했던 극도의 고립에서 탈피하겠다는 의사로 볼 수 있다. 이는 북한이 공산권 붕괴와 김일성 사망의 충격으로부터 벗어나 어느 정도 자신감을 회복했음을 뜻한다. 그러나 문제는 고립 탈피가 무엇을 위한 것이냐에 있다. 과연 이것을 북한의 개방·개혁의 신호탄으로 볼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단서는 북한이 핵심적 이해를 갖는 한국, 미국, 중국과의 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먼저 남북한 관계를 보자. 최근 우리 정부는 남북간에 상당한 물밑접촉이 있었으며 머지않아 한반도에 큰 변화가 올 것처럼 자신하지만, 그렇게 되리라는 객관적 징후는 별로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북한은 서해에서 다시 긴장을 조성하는 등 군사적 대결자세를 늦추지 않고 있다. 대북지원 제의에 대해 북한이 명백히 거부의사를 표명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대단한 변화로 보기는 어렵다. 사실 민간이든 당국이든 대북지원 제의는 북한으로서는 내심 반가운 소식이지만, 문제는 접촉에 따른 개방바람이 두려워 선뜻 나서지 못하고 있다. 이런 북한의 태도는 변화와는 분명 큰 거리가 있는 셈이다.

미·북관계는 핵, 미사일 등 대량파괴무기에 대한 북한의 의도를 가늠할 수 있는 척도다. 작년 9월 페리 보고서 제출 이후 미·북관계는 당초의 기대와는 달리 반년 넘도록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 과거 미국에 대해 대화를 졸라대던 북한은 정작 미국이 대화에 나서자, 소극적 태도로 변해 이런 저런 이유로 고위급 회담을 지연시키고 있다.

반면 북·중관계는 미·북관계와는 대조적으로 급류를 타고 있음을 분명히 느낄 수 있다. 지난달 김정일의 평양주재 중국대사관 방문은 단순한 해프닝으로 보기 어려운 복잡한 복선이 깔려있는 듯하다. 북한은 중국으로부터 무언가를 원하고 있으며 그것은 단순한 식량지원이나 경제협력을 넘는 군사적·전략적 차원의 협조 요청일지도 모른다. 한반도의 안정을 원하는 중국이 이런 요청에 쉽게 응하지는 않겠지만 최근 대만선거를 계기로 급변하는 중·대만관계를 감안하면 전혀 가능성이 없다고 단정하기도 어렵다. 독립지향적인 민진당 천수이볜의 당선으로 양안관계의 성격은 근본적으로 변하고 있고, 대만문제에 대한 미국의 개입을 견제하고자 하는 중국에 북한의 전략적 가치는 앞으로 더욱 커질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최근 북·중 접근은 상당한 전략적 잠재력을 지닌 것으로 우리로서는 경계해야 할 움직임이다.

북한의 부산한 외교적 몸짓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독해(독해)하기는 쉽지 않다. 고립탈피의 행보가 일견 바람직하게 보이지만 그 이면의 의도는 반드시 긍정적인 것만은 아닐 수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 총선을 앞두고 정부는 연일 북한특수, 경제공동체, 남북정상회담을 장담하지만 현실은 이런 장밋빛 전망과 상당한 거리가 있어 보인다. 평양이 벌이는 ‘외교 셔레이드’를 풀기 위해서는 막연한 낙관이 아니라 동북아의 전략적 변화와 북한의 복잡한 계산을 정확히 읽어낼 수 있는 냉철한 안목이 필수적이다.

백 진 현 /서울대 국제지역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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