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하 조선일보 사장을 지낸 민족지도자 고당(고당) 조만식(조만식) 선생의 부인 전선애(전선애·96) 여사가 29일 오전 7시45분 서울 양천구 목동 자택서 별세했다. 가족들은 “오래 전부터 죽음을 예비해 오신 듯, 주무시듯 돌아가셨다”고 말했다.

전 여사는 평생 고당의 부인임을 명예로 생각하며 근검하고 기독교적인 삶으로 존경을 받아왔다. 노령으로 불편한 몸을 이끌고도 매일 을지로3가 고당 기념관 꼭대기 통일기도실에 들러 통일을 기원했다.

48년 북한에 공산정권이 들어선 직후, 남편 고당을 평양에 남겨두고 어린 삼남매와 함께 월남한 전 여사는 91년 서울 국립묘지에 고당 선생을 안장하기까지 노랗게 빛바랜 편지봉투에 든 고당 선생의 머리카락과 손톱을 고스란히 간직해왔다.

“상당히 연로하셔서도 늘 버스만 타고 다니셨습니다. 좋은 옷을 입는 법도, 기름지고 맛있는 음식을 찾는 법도 없었죠. ” 연세대 앞 창천교회 박춘화 담임목사는 34년간 지켜본 전 여사의 모습을 이렇게 전했다.

전 여사는 엘리트 신여성이었다. 1904년 일찍이 개화한 개성의 감리교 집안에서 태어나, 호수돈여학교를 나온 뒤 1925년 이화여전 문과에 진학했다. 2년간 영문과에 다니던 그는 음악과로 전과, 피아노를 전공했다. 배화여고, 평북 영변 숭덕중학교를 거쳐 모교인 개성 호수돈여고 음악 교사를 지내다 조만식 선생과 결혼했다. 그가 서른넷, 고당이 쉰여섯이었다. 호수돈여고에서 함께 교사로 일했던 유달영 성천문화재단 이사장은 “상냥하고 점잖은 분이었습니다. 이렇게 훌륭한 분이 왜 서른이 넘도록 혼인을 안하시느냐고 제가 싱거운 소릴 했더니, 아주 진지하게 ‘나는 마음으로부터 존경하는 남자를 만나기 전엔 안합니다. 내 인생관이 그렇습니다’ 하시더라고요”라고 기억했다. 인품에 감화한 결혼이었지만, 현실은 쓰라렸다. 고당이 조선일보사 사장을 지낸데다가 물산장려 운동과 민족운동에 전념하던 때라, 늘 일제의 감시가 뒤따랐다. 해방 후엔 공산당에 연금까지 당했다. 고려호텔에 갇힌 고당을 마지막 본 것은 1947년 2월. 호텔로 면회갔다 우연히 마주쳤지만, 정작 면회는 거절 당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1948년 11월 이제 겨우 열살에서 다섯살배기까지 아무 것도 모르는 나이어린 세 자녀를 데리고 홀로 월남한 그는 생활형편이 극히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아무에게도 고당 가족임을 밝히지 않았다.

전 여사의 평생 소원은 두 가지였다. 고당을 국립묘지에 모시는 것과 이 땅의 통일을 보는 것. 앞의 소원은 91년 이뤄졌지만 또 하나의 소원은 우리 모두의 소원으로 아직도 남아있다. 발인은 31일 오전 9시. 유해는 국립묘지 고당 선생 묘소에 합장될 예정이다. 유족으로는 선영(62) 연흥(60·조선일보 이사,제작국장) 연수(58·고당기념사업회 사무국장)씨가 있다.

(02)363-9699 /박선이기자 sunnyp@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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