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군인들이 부대내 교양실에서 정치학습을 받고 있다. /자료사진




"사모님은 장군님과 꼭 같은 분이다. 따라서 장군님을 모시듯 사모님을 모셔야 하며, 장군님의 신변안전을 보위하듯 사모님의 신변안전도 목숨으로 보위해야 한다."

1998년 12월 북한 개성시 판문군(2002.11 개성공단 지정과 함께 없어짐) 소재 인민군 민경부대에서 시작됐던 '사모님 따라 배우기'운동의 화두다.

일찍이 인민군 역사에 없었던 이 운동은 최근 인민군 내부문건 공개로 실체를 드러낸 김정일의 처 '고영희 띄우기'의 서막이자, 김정일과 그녀 사이의 소생 김정철 후계구도 가시화를 위한 정지작업의 첫걸음이기도 했다.

이곳 민경부대에 근무하다 지난해 2월 휴전선을 넘어온 주성일(23)씨는 '사모님 따라 배우기'운동이 여러 형태로 전개됐으며, 과거 김정숙 우상화의 완벽한 재판이었다고 회고했다. 이 운동이 시작되면서 종래 김정일의 생모인 김정숙을 따라 배우는 운동이 사라졌으며, 김정숙이 있던 자리는 모두 사모님의 차지가 됐다고 한다.

주씨에 따르면, 운동의 주요 내용은 '장군님의 사모님'(김정일의 부인)이 인민군 최고사령관인 김정일 동지를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고 그의 신변안전과 건강을 위해 온갖 정성을 다 바치고 있다는 것, 그가 인민군 병사들과 인민들에게도 친어머니의 심정으로 노고와 배려를 아끼지 않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런 사모님의 헌신적 희생정신과 인간애를 인민군 장병들이 적극 따라 배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사모님의 '모범적인 행위'가 사례와 일화 형식으로 정리돼 <덕성실기>라는 책자로 묶여져 나왔으며, 유사한 내용의 내부문건들이 수시로 내려와 사상교양을 위한 강연자료와 학습교재로 쓰였다. 장병들은 이를 가지고 학습을 하고 토론을 벌였으며 결의대회를 갖기도 했다.

사모님의 '덕성'을 찬양하는 노래도 쏟아져 나와 군인들이 행군이나 구보 등 대열행진을 할 때 합창곡으로 불렸다. 개중에는 행진곡 풍으로 전혀 어울리지 않는 노래도 있었지만 그런 것은 개의치 않았다. 군인들이 이런 노래를 열심히 불러야 인민들도 따라 부른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비무장지대 경비업무를 맡고 있는 민경부대는 농번기에도 농민들의 모내기·밭갈이·가을걷이 등을 돕는 농촌지원에 동원되지 않는 것이 오랜 관례였다. 그러나 '사모님 따라 배우기'운동이 시작되면서 농촌지원에도 적극 투입됐다. 농촌의 부족한 일손을 돕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농민들에게 사모님과 관련한 노래를 가르쳐주고 그의 "덕성"을 널리 선전하기 위해서였다.

장병들이 출장을 나가게 되면 바깥 사회의 동향과 주민생활상에 관한 정보를 수집해 보고하는 것이 주요 과제의 하나였다. 하지만 이때부터는 밖에 나가 반드시 사모님의 덕성 사례를 소개·선전하고, 주민들의 반응을 살펴 보고하는 것이 우선적인 임무로 바뀌었다.

사모님의 덕성실화 가운데는 그가 96년 3월 김정일의 서부전선 대덕산 초소 시찰 때 동행했던 일화도 포함돼 있다.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파주군 진동면과 마주하고 있는 북한쪽 최전방 고지인 대덕산(236m)은 63년 2월 김일성이 '일당백'(一當百) 구호를 제시한 곳으로 유명하며, 주씨가 근무했던 민경부대와는 지척에 있는 곳이다.

당시 김정일을 따라 이곳을 찾은 사모님은 민경부대 군인들이 고생을 많이 한다며 그들에게 박하사탕과 장교복 지급을 약속했고, 4개월 뒤 실제로 박하사탕과 장교복이 지급돼 병사들이 좋아했다고 한다. 물론 사모님에게 고마워해야 한다는 주문도 빠뜨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군인들이 김정일과 함께 촬영한 기념사진에 사모님의 얼굴이 들어 있다는 이유로 사진을 나눠주지 않아 원성을 사기도 했다. 김정일과 찍은 사진은 제대 후 사회에 나가 크게 행세할 수 있는 확실한 근거가 되는데 어렵게 맞은 기회가 물거품이 됐기 때문이다.

주씨는 "'사모님 따라 배우기'운동은 사실 별 내용이 없는 것인데 선전은 대대적으로 했다"면서 "1년 정도 크게 떠들다가 갑자기 시들해지면서 자취를 감췄다"고 했다. 또한 군인들이 상부의 지시에 따라 '사모님 따라 배우기'운동을 열심히 벌였지만 사모님이 김정일의 부인이라는 것 외에 그에 대해 아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고 주씨는 밝혔다.

고급 군관(장교) 사이에서는 간간이 '고영희'라는 이름이 오르내리고, 그녀 소생의 아들이 외국에 유학중이라는 얘기가 설왕설래되기도 했지만 그것이 전부였다는 것이다.
/金光仁기자 kk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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