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6월 현대상선에 4000억원을 대출하고 그 돈 중 2240억원(2억달러)을 북한에 송금하는 일을 총지휘한 사람은 누구이며, 어떤 기관들이 이 과정에 개입했을까?

아직 베일에 가려 있지만 현 정부의 최고위급 실력자가 막후 총지휘를 맡지 않았다면 국가정보원과 국책은행인 산업은행까지 동원하긴 힘들었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지난해 국감 증언 등을 통해 4000억원의 ‘대출 지시’ 의혹이 표면화된 사람은 한광옥(韓光玉)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현 민주당 최고위원)이다. 엄낙용(嚴洛鎔) 전(前) 산은 총재는 지난해 10월 4일 국회 재경위 국정감사에서 “4000억원 대출이 이상해서 전임 총재인 이근영 금감위원장에게 물었더니 ‘청와대 한 실장의 전화 때문에 나도 어쩔 수 없었다’고 말했다”고 증언했다.

이런 주장에 대해 한광옥 최고위원은 “4000억원의 4자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전면 부인하면서 작년 10월 엄낙용 총재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그러나 한 달여 뒤 소송을 스스로 취하했다.

특히 산은이 정식 여신심사위원회를 안 거쳐도 되는 일시 당좌대월(마이너스 통장)을 통해 주채권은행인 외환은행도 모르게 돈을 빌려준 점 등이 많은 의혹을 낳았으며, ‘고위층의 지시’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란 지적을 받아왔다. 이근영 금감위원장은 그동안 “만약 그 돈이 북한으로 간 게 사실이라면, 어떻게 그런 (엄청난) 일을 산은 총재에게 알려주고 돈을 대출해 주라고 했겠느냐”고 말해왔다. 대북한 송금은 권력 핵심층만이 알고 개입했을 것이라는 뉘앙스였다.

이를 방증하듯 여권 고위 관계자는 30일 “2억달러를 북한에 보내는 과정에서 국정원이 환전 등에서 편의를 봐준 것 같다”고 말했다. 당시 국정원장은 임동원(林東源) 현 대통령 외교안보통일특보다. 그러나 임 특보는 그동안 이 문제에 대해 “알지 못한다”고 말해왔다.

국정원이 편의를 봐줬다면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하나는 국정원의 계좌를 통해 달러로 환전해 현대 해외지사를 거쳐 돈을 북한으로 보내거나, 국정원이 현대가 달러로 환전할 때 이서(裏書) 등으로 돈 세탁에 도움을 준 경우이다. 현재까지 국정원 계좌를 이용하거나 국정원이 직접 환전해 줬을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국정원이 현대의 대북 비밀송금 돈세탁에 관여한 것이다. 국정원은 이런 가능성 모두를 부인했다.

만에 하나 당시 국정원장도 모르게 이 같은 ‘편의’를 활용하려면 국정원보다 더 ‘윗선’의 지시가 없이는 어렵다. 한나라당은 그동안 대북 비밀송금의 총지휘자로 당시 문화부장관이었던 박지원(朴智元) 현 청와대 비서실장을 의심해왔다.

박 실장이 2000년 3~4월 중국에서 진행된 남북 정상회담준비 비밀협상에 참여했고 박 실장만큼 지난 5년 동안 김 대통령의 각별한 신임을 받은 인사도 드물기 때문이다.

더욱이 박 실장과 정상회담 비밀협상을 벌인 송호경 북한 아·태평화위원회 부위원장이 바로 고(故) 정주영(鄭周永) 현대 명에회장의 카운터파트너였다. 아·태평화위원회가 현대의 대북사업을 총괄하는 북한 기구란 점에서, 현대와 북한, 박 실장 간의 커넥션이 제기됐다. 그러나 박 실장은 국회 상임위원회 등에서 “전혀 사실이 아니다”고 부인했다.
/ 김인구기자 ginko@chosun.com
/ 黃順賢기자 icaru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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