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간 특사교환의 시작은 지난 72년 5월2일 당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평양을 비밀리에 방문, 김일성 주석을 두차례 면담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지만 이씨는 공개된 특사(Special envoy)라기보다는 밀사(Emissary)에 가까웠다.

이어 북한의 박성철 당시 부수상이 같은 달 29일 이후락 부장의 평양방문에 대한 답방으로 서울을 방문, 막후 접촉 등을 거쳐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됐다.

5공화국 때에는 장세동 안기부장과 허담 노동당 중앙위원회 비서가 정상회담 추진을 위한 밀사 역할을 했다.

85년 9월5일 허 비서는 "각하(전두환 전 대통령)와의 평양 상봉이 이뤄질 것을 기대한다"는 김 주석의 친서를 갖고 서울을 찾았으며 두달 후 장 부장과 박철언 당시 청와대 특별보좌관 일행이 평양을 방문했으나 정상회담이 성사되지는 않았다.

노태우 정부 때에도 박철언씨가 '북방밀사'로 대북관계에 핵심 역할을 맡았다.

밀사가 아닌 특사의 교환이 논의된 것은 김영삼 정부 시절인 93년 북한 핵위기 때였다. 북핵 문제가 다시 불거진 현재와 매우 흡사한 상황에서 였다.

핵문제 해결을 위해 남북고위급 회담 개최를 위한 대표접촉을 갖자는 우리측 제의에 북한이 남북 정상간 만남과 현안해결을 위한 특사 교환을 역제의, 93년 10월5일부터 94년 3월19일까지 실무접촉이 진행됐으나, 북한 박영수 대표단장의 '서울 불바다' 발언으로 한국내 여론이 급속히 악화되면서 특사교환이 무산됐다.

김대중 대통령은 98년 2월 취임식사에 이어 2000년 3월 '베를린선언'에서도 남북 당국간 특사 교환을 촉구하고 나섰다.

이후 2000년 3월 박지원 당시 문화관광부 장관과 북한 송호경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부위원장이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비밀접촉, 같은 해 6월 남북정상회담 성사에 산파 역할을 했다.

그 해 5월 임동원 당시 국가정보원장이 특사로 평양을 방문,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비롯해 북한 고위인사들을 만나 정상회담을 사전 조율한 것으로 전해졌다.

임 외교안보통일특보는 지난 해 4월 3일부터 나흘간 평양을 방문, 김정일 위원장을 면담, 당시 정체돼 있던 남북관계를 타개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으며, 이번에 가면 임 특보가 대북특사 역할을 맡는 것은 세번째가 된다.

같은 해 9월 서울에 와서 김 대통령과 임동원 당시 대통령 특보 등을 만나고 돌아간 김용순 노동당 중앙위 비서도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특사였다./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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