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盧武鉉) 대통령 당선자가 지난 16일 가와구치 요리코(川口順子) 일본 외상을 만난 자리에서, 북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이 북한에 공급하다 중단한 중유(重油)를 일본이 대신 공급해줄 것을 요청했던 것으로 17일 확인됐다.

미국은 지난 94년 10월 미·북 제네바 합의에 따라 북한이 핵시설을 동결하는 대가로 95년부터 매년 50만t의 중유를 공급해 왔으나, 작년 10월 북한이 제네바 합의를 어기고 고농축 우라늄 핵계획을 추진 중이라는 사실이 드러나, 한국·일본과의 합의하에 12월부터 중유 공급을 중단했다. 북한이 이에 반발해 핵시설 동결 장치들을 해제하고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하는 등 핵파문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이다.

일본 도쿄(東京)의 한 외교 소식통은 이날 “노 당선자가 가와구치 외상과의 면담에서 북한이 혹한기에 중유 공급이 끊겨 고통을 받고 있고 제2, 제3, 제4의 위험한 행동을 보일 수 있기 때문에 일본이 중유를 제공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노 당선자가 한·미·일 합의에 의해 공급을 중단한 중유를 미국과 아무런 조율을 거치지 않고 일본측에 대신 공급해 달라고 요청했다는 점에서 미국의 반응이 주목된다.

이에 대해 가와구치 외상은 “북한 핵문제는 중유 공급 중단 때문이 아니라, 북한의 고농축 우라늄 핵개발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북한이 아무런 긍정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은 상황에서 중유를 제공하는 것은 곤란하다”며 당선자의 요청을 거절했다고 이 소식통은 전했다.

노 당선자는 또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가 (내) 취임식에 오기로 한 것을 환영하며 나도 정대철(鄭大哲) 대미 특사가 미국 가는 길에 일본에 먼저 들러 고이즈미 총리를 만나게 할 계획”이라면서 “그러나 우리 국민들이 고이즈미 총리의 방한에 반대하는 여론을 일으키지 않을까 우려된다. 내가 국민들을 설득하겠다”고 말했다.

노 당선자는 고이즈미 총리가 지난 15일 야스쿠니(靖國) 신사를 전격 참배한 데 따른 국민들의 반감을 염두에 두고 이같은 발언을 한 것으로 보인다./東京=權大烈기자 dykwo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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