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영변 원자로에 설치된 봉인과 감시카메라 제거작업에 나선 것은 핵시설을 재가동하기 위한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행동에 돌입했음을 뜻한다. 이 원자로가 다시 돌아가기 시작하면 여기서 핵무기 원료인 플루토늄이 만들어지게 되지만, 감시장비의 무력화로 북한이 언제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 파악하기도 어렵게 됐다. 한반도 핵위기가 가시권으로 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북한이 핵개발 프로그램 시인과 핵시설 재가동 공언 후 한 단계씩 위협 수위를 올리고 있는 것은 미국과의 불가침협정 체결을 비롯한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관철하기 위한 예상된 수순이라고 할 만하다. 이에 맞서 한·미·일을 주축으로 한 국제사회는 평화적 해결이라는 원칙만 강조할 뿐 아직까지 이렇다할 효과적인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여기에는 한국이 대통령선거 와중이었다는 사실이 큰 이유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북한이 한국 대선 직후에 다시 위기 수준을 끌어 올리고 있는 데에는 정부 이양기의 한국과 미국이 본격적인 공조체제를 갖추기 전에 자신의 입지를 더 강화해 놓으려는 의도가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노무현 당선자의 대북·대미관(觀)과 북핵 해법에 대한 구체적 구상을 조기에 확인해 보려는 생각이 깔려 있을 수도 있다. 이 점에서 노 당선자가 북핵문제에 대해 신중하면서도 단호한 입장을 가능한 한 조속히 밝히는 것은 북한이 잘못된 기대를 갖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본다.

노 당선자가 부시 미국 대통령에게 약속한 대로 취임 직후인 내년 3월쯤 미국을 방문하면 북핵문제가 최대 현안으로 다루어지겠지만, 지금의 사태진행에 비추어 그 이전에라도 노 당선자측의 구상이 반영된 한·미 정부 간의 긴밀하고 심도있는 협의가 요긴하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한·미 간에 불필요한 불협화음이 나오지 않도록 하는 일이다. 한·미 간 틈새는 북한으로 하여금 위기를 더욱 고조시키고 싶은 마음이 생기도록 하는 더할 수 없는 유혹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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