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선섭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기획단장이 14일 미국 뉴욕에서 열린 집행이사회를 마친 직후, 이사국인 미국·일본·EU 대표들이 옆에 앉아있는 가운데 ‘다음달부터 북한에 대한 중유(重油) 지원을 중단한다’는 등의 합의내용을 담은 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뉴욕=金載澔특파원 jaeho@chosun.com

한·미·일·EU(유럽연합) 등 4개국으로 구성된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가 14일 집행이사회에서 채택한 북핵(北核) 관련 성명은 미국의 입장이 상당히 반영된 강도높은 내용을 담고 있다.

현재 배에 실려 북한으로 향하고 있는 11월분 중유 4만2500t은 예정대로 공급키로 함으로써 한 달여의 시간은 벌었지만, 북한이 가시적이고 검증 가능한 방법으로 핵무기 프로그램을 제거하지 않을 경우 12월부터 중유 제공 중단과 함께 추가 조치도 있을 수 있음을 공식 예고했다.

우선 ‘북한과의 여타 KEDO 활동도 재검토될 예정’이라는 문구는 결국 경수로 2기(基)의 건설도 중단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중유 공급과 경수로 건설은 1994년 미·북이 맺은 제네바 합의에 따라 북한이 핵무기 개발 의혹을 받아온 원자로들의 가동 및 건설을 동결하는 대가로 KEDO가 짊어진 의무의 양대 축이다. 중유 공급에 이어 경수로 건설이 중단된다면 제네바 합의는 미·북 어느 쪽이 파기 선언을 하든 않든 상관없이 사실상 껍데기만 남게 된다.

미국은 제네바 합의의 무효화 또는 폐기나 파기 여부에 대해 스스로 적극적인 입장을 밝히지는 않은 채 “북한이 ‘제네바 합의가 무효화됐다’고 말했다”는 말만 하고 있고, 이날 KEDO 집행이사회에서도 제네바 합의의 국제법적 지위에 대해서는 구체적 논의가 없었다. 북한에 대한 자극을 피하면서 제네바 합의가 공식 사문화될 경우 그 책임이 북한에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한 포석이다.

KEDO 이사회는 또 북한과 한·일·EU와의 대화 채널의 필요성은 인정했지만 ‘북한의 KEDO 및 KEDO 집행이사국들과의 향후 관계와 상호 활동은 북한 핵무기 프로그램의 완전하고 영구적인 제거에 달려 있다’고 합의함으로써 북한과의 대화 지속에 ‘조건’을 붙여 놓았다.

북한이 끝내 핵 프로그램 폐기를 거부할 경우에는 북한과 한·일·EU 등의 관계에도 적신호가 켜질 수 있다는 뜻이다. 이로써 북핵 타결과 남북교류는 별개로 추진한다는 한국 정부의 기존 입장은 타격을 받게 됐다.

KEDO가 내놓은 이번 성명은 또 북한의 농축 우라늄을 이용한 핵무기 개발 행위가 여러 국제협정의 ‘명백하고 심각한 위반’이며, 다른 국가들에 대한 ‘공동의 도전’이고, 비확산체제를 ‘훼손하는 것’이라고 규정하면서 ‘규탄한다’고 함으로써 강도 높게 비난한 점도 특색이다. 이 문제의 국제화를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날 이사회에서는 가능하면 북한을 덜 자극하려는 한국과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미국 정부 간에 단어 하나하나를 놓고 팽팽한 신경전이 벌어진 것으로 전해졌다. 오전 10시30분부터 저녁 7시까지 마라톤회의가 이어졌다. 한·미 양국은 ‘중유 11월분은 제공, 12월부터 중단’이라는 선에서 가까스로 타협했지만, 앞으로 추후 조치에 대한 결정을 내릴 시점에서 다시 이견이 빚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통상 두 달에 한 번씩 이사회를 여는 KEDO는 다음 회의 일정을 12월 11~12일로 잡아 놓았다. 북한이 그 안에 만일 핵 프로그램 폐기를 위한 극적인 조치들을 취한다면 12월분 중유 공급은 재개될 가능성도 남아있기는 한 것이다. 북한의 대응 여부에 따라 한·미·일 3국 공조는 계속 시험대에 오를 것으로 보인다.
/ 워싱턴=朱庸中특파원 midway@chosun.com
/뉴욕=金載澔특파원 jaeho@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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