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북한의 핵개발을 이유로 94년 북미 제네바 기본합의에 따른 대북 중유지원 중단을 강력히 요구하는 것으로 알려진 가운데 북한은 이 합의가 파기된 것과 다름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북한의 고위 관계자는 연합뉴스와 한 전화 인터뷰에서 "미국은 기본합의 중 북미 관계 정상화 추진, 상대방에 대한 위협 금지, 원자력 발전소 2003년까지 완공 등 3개항을 이미 위반했으며 만일 중유지원까지 중단한다면 중대 위반사항이 하나 더 늘어나게 된다"고 지적했다.

이 관계자는 따라서 "기본합의는 사실상 미국에 의해 파기된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했으나 북한측은 기본합의가 이미 파기돼 더는 지킬 의무가 없다고 보느냐는 질문에는 명백한 대답을 회피했다. 이 관계자는 다만 "이 문제에 대해서는 평양에서 입장표명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이 북미 기본합의의 파기를 선언한다면 이 합의에 의해 특수용기에 밀봉된 채 국제사찰단의 감시를 받고 있는 플루토늄을 이용해 핵무기 제조에 나설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기본합의의 파기 여부에 관해 아직 명확한 입장이 정해지지 않았다는 이 관계자의 언급은 아직 이와 같은 상황까지를 염두에 두고 있지는 않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이 관계자는 "북미 기본합의가 가느다란 실에 매달려 있는 위태로운 형국"이라고 말해 언제든지 기본합의가 파탄에 이를 수 있다는 점을 경고했다. 이 관계자는 북미 기본합의의 수정이 필요한 지에 대한 질문에는 "기본합의가 잘못됐다거나 파기돼야 한다는 주장은 미국이 먼저 들고 나왔다"는 말로 답변을 대신했다.

이 북한 관계자는 뉴욕 타임스가 최근 한성렬 유엔 주재 북한대표부 차석대사의 회견을 근거로 북한이 핵개발 포기와 국제 핵사찰의 수용의사를 밝혔다고 보도한 데 대해서는 거두절미로 인한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이 회견에서는 "미국이 불가침 선언을 채택해 북한에 대한 위협을 제거할 경우 핵문제를 포함해 미국의 모든 안보 우려를 해결할 수 있다는 원칙적인 입장을 밝혔다"며 "기사는 이와 같은 중대한 전제를 지적하지 않고 뒷부분만 부각해 보도했다"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또 북한이 제임스 켈리 미국 특사의 방북 회담 때 핵개발 사실을 시인했느냐는 질문에 "그런 사실을 시인한 적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미국이 우라늄 농축 사실을 들고 나와 `우리는 미국의 적대적인 정책에 맞서 농축 우라늄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한 것이라도 갖도록 돼 있다'고 말했을 뿐"이라면서 "적대국가인 미국에 우리가 설명해줄 필요는 없으니 해석은 마음대로 하라"고 밝혔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미국이 농축 우라늄에 관한 증거도 내놓지 않은 채 위압적인 태도를 보여 당시 북한 관리들은 감정이 격해져 있었던 것 같다"고 말해 의도적으로 핵개발 사실을 시인했다거나 미국의 결정적인 증거에 어쩔 수 없이 인정했다는 관측을 부인했다.

그러나 이 관계자는 북한이 핵개발을 진행중이냐는 질문에는 "확인도 부인도 할 수 없다"고 언급을 회피했다. 그는 북한의 핵개발을 둘러싼 북미 긴장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불가침선언을 토대로 한 대화가 유일한 방안이라는 종전 입장을 재차 강조하면서도 "압력을 전제로 한 대화에는 흥미가 없다"고 밝혔다./뉴욕=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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