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농축우라늄을 이용한 핵무기 개발을 포기하라는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요구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자신들에 대한 적대시 정책 포기를 거듭 요구하고 나섰다.

김영남(金永南)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은 21일 남북 장관급회담 우리 측 수석대표인 정세현(丁世鉉) 통일부 장관과의 비공개 회담에서 북한 핵 개발 문제의 심각성을 지적한 정 장관의 문제 제기에 대해 “미국이 우리에 대한 적대시 정책을 철회할 용의가 있다면 대화를 통해 미국이 말하는 ‘안보상 우려 사항’을 해소할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 이는 북한 강석주(姜錫柱) 외무성 제1부상이 지난 4일 부시 대통령 특사로 방북한 제임스 켈리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를 만났을 때 했던 것과 똑같은 말이다.

강 제1부상은 보다 구체적으로 이번 핵 문제를 포함 북한 핵·미사일 등 미국이 말하는 ‘안보상 우려 사항’과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 철폐 등 북측 요구사항을 일괄타결하자고 제의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는 북한이 추가적인 핵카드로 미국과의 협상을 시도하려는 것이 아니냐는 분석을 낳고 있다.

그러나 미국은 북한의 이런 추가적인 핵 개발이 8년 전 체결한 미·북 간 제네바 합의를 정면으로 위반한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협상 대상 자체가 될 수 없다는 점을 이미 명확히하고 있다.

이에 따라 제네바 합의는 8년 만에 심각한 위기 상황을 맞고 있다. 북한이 이런 위기 상황을 스스로 조장하는 이유는 명확히 파악되지 않고 있으나 미국과의 전면적인 관계개선을 겨냥한 카드일 가능성이 있다는 게 당국의 분석이다.

북한으로선 1994년 제네바 핵 합의에 따라, 핵 개발을 중단하는 대가로 경수로 원전 2기(基)는 얻었으나, 역시 제네바 합의에 명시된 미·북관계 개선은 이루지 못했다.

클린턴 행정부 때인 2000년 10월 ‘조·미 공동코뮤니케’에 이를 명시했으나, 부시 행정부가 이를 사문화(死文化)해 버렸다. 따라서 북한은 새로운 핵 합의를 통해 부시 행정부와 관계 개선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라는 게 우리 정부 당국자들의 분석이다.

북한은 또 한반도의 지정학적 특성상 미국의 군사적 공격이 쉽지 않고 경제적 제재 역시 중국과 러시아 등이 동의하지 않을 경우, 효과가 적다는 점을 계산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북한 핵 문제를 협상 테이블로 가져가지 않겠다는 게 미국측의 분명한 입장이기 때문에 사태는 북측 뜻대로 굴러가기 어렵게 돼 있고, 이에 따라 북핵 문제는 장기화할 가능성이 있다는 관측들이다.

때문에 북한은 기존의 제네바 핵 합의도 계속 붙잡고 있는 전략을 구사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비록 강석주 제1부상이 켈리 차관보에게 “제네바 합의는 무효가 됐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이는 미국측에 합의 이행을 촉구하는 ‘압박’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평양방송은 21일 제네바 합의(10.21) 8주년을 맞아, “미국은 우리에 대한 강경 적대시 정책을 포기하고 우리와 한 공약을 성실히 이행하라”고 촉구했다.
/김인구 기자 ginko@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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