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없시요.” 북한의 여자 마라토너 함봉실(28)은 32.5㎞ 지점에서 물을 머금은 스폰지로 얼굴과 어깨를 닦은 뒤 갑자기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10㎞ 전부터 2파전을 벌이던 일본의 오미나미 히로미(27)를 제치고 앞서 내달렸다. 당초 34㎞부터 치고 나간다는 작전이었는데, 더 빨리 스퍼트했다.

김해 코치가 “1등은 할 것 같으니 무리하지 말라”고 주문했지만 그대로 밀어붙였다. 허리엔 복근을 눌러주기 위해 흰색 띠를 둘렀고, 왼쪽 손목엔 동료들이 써준 ‘대담’, ‘투지’라는 글자를 적은 테이프를 붙이고 있었다.

나머지 10㎞는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골인 지점을 2~3㎞ 남겨두곤 붉은색 트레이닝복 차림의 북한선수단 관계자들이 그와 나란히 달리며 소형 스피커로 “힘내라”고 응원했다.

부산 시민들의 박수를 받으며 힘찬 레이스를 펼치던 함봉실은 주경기장으로 진입하는 마지막 오르막에서 옆구리를 손으로 쥐고 비틀거렸다. 갑작스런 복통으로 쓰러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순간, 자세를 바로잡고 다시 뛰었다.

함봉실이 경기장 트랙으로 들어서자 아침부터 스탠드에 자리잡고 있던 북측 응원단 270여명은 모두 일어서서 “우리 선수 이겼다”라며 환호성을 올렸고, 취주악단은 ‘승리의 팡파르’를 연주했다.

2시간33분35초. 함봉실이 아시안게임 마라톤서 북한에 사상 첫 금메달을 안기는 순간이었다. 함봉실은 인터뷰에서 “일본 선수들의 기록이 좋아 중반까지 뒤에서 따라갔다”며 “오늘은 우리가 우승했으니 내일은 이봉주 선수가 우승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함봉실은 2000시드니올림픽서 8위를 하며 국제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낸 선수. 작년 베이징 하계유니버시아드 대회 하프마라톤과 지난 4월 만경대상 국제마라톤 우승을 차지했다. 8월 아시아선수권(스리랑카 콜롬보)에선 5000m와 1만m를 제패, 이번 대회의 선전을 예고했다.

일본의 히로야마 하루미(2시간34분44초·34)가 두 번째로 골인했고, 오미나미(2시간37분48초)는 3위로 처졌다. 한국의 오미자(2시간42분38초·32·익산시청)와 지난 대회 은메달리스트 김창옥(2시간43분17초·27)이 뒤를 이었다. 한국 기록보유자인 권은주(25·삼성전자)는 37㎞ 지점에서 기권했다.

한편 아시안게임 남자 마라톤서 2연속 월계관을 노리는 한국의 이봉주(32·삼성전자)는 14일 오후 3시 ‘금메달 피날레’에 나선다. 이봉주는 “어느 대회보다 충실히 준비했다”며 “컨디션도 좋다”고 말했다./부산=성진혁기자 jhsung@chosun.com
저작권자 © 조선일보 동북아연구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