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대통령의 베를린 선언이 결실을 보려면 무엇보다도 이를 비정치화해야 할 것이다. 이 선언은 민간중심 경협을 당국간 협력 및 대화를 격상하기 위한 것으로, 미·일이 시도하는 대북협상과 북한의 개방외교와 보조를 같이 한다. 이것이 성공을 거두려면 북한이 호응해야 하고, 한국 내에서는 초당적 지지가 필수적이다.

이번 선언은 지금까지 전개되어온 남북관계의 수준을 초월해보고자 하는 데 그 의의가 있다. 정경분리 원칙에 입각하여 현대가 야심적으로 추진해온 민간수준의 경협은 어느 한계에 달했다는 것이 드러나고 있다. 현대나 기타 대기업의 서해안공단 계획과 같은 대대적 사업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허가는 물론이고, 당국간에 투자보장 및 이중과세방지협정이 필요하다. 이 같은 협정이 체결되려면 현재 대결상태에 있는 남북관계가 참된 평화공존관계로 전환되어야 한다. 이 획기적 사태 진전을 성사시키려면 당국자 회담도 이루어져야 한다.

이 선언의 내용과 전달방법은 북한의 입장을 최대한 배려했다. 예컨대 북한의 경제회복을 지원하기 위해 농업구조 개선과 사회간접시설 확충을 제시한 것이 이에 속한다. 이러한 제안을 사전에 아태평화위원회 김용순 위원장에게 전달한 것도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실질적 남북대화의 창구를 열기 위해서였다.

외교적으로도 베를린 선언은 미·일의 대북협상과 북한 자신의 대서방 외교공세와 조화를 이룬 것이다. 미·일은 ‘페리 보고서’에 따라 대북 포용과정을 출범시키기 위하여 각기 고위회담 및 수교협상을 준비하고 있는데, 한국이 이 선언을 발표한 것은 우리가 남북관계를 주도하기 위해 취한 적절한 조치이다.

사실 북한은 남한과의 화해·협력을 계속 회피할 수 없는 현실이 전개되고 있다. 한국정부와 본격적인 경제교류 및 협상을 하지 않는 상태에서 한국의 민간기업들은 물론, 미·일을 비롯한 서방국가들의 기업이 북한에 투자할 이유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 에너지난 등 열악한 조건하에 있는 북한에 서방자본이 들어가 수익성을 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정주영 회장과 같은 이북출신 남한기업인들은 고향에 대한 애착심으로 모험을 무릅쓰고라도 대북사업에 뛰어들고 있는 것이다. 이들도 대규모 공단건설에 착수하려면 정부의 지원과 해외자본의 도움 없이는 더이상 진전할 수 없게 된다. 한국정부는 북한에서 기반시설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국민이 낸 세금을 써야 하므로 국회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분명히 민간기업들만의 경협은 그 한계점에 도달했다.

북한당국도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상적으로는 남북 당국간에 사전합의를 이루고 당국자 회담이 실현되어야 실질적 경협과 이산가족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그래야만 상호주의에 입각하여 북측은 평화를 보장하고, 남측은 경협을 주는 관계가 실천될 것이다. 이것이 가능한가를 한번 시험해 볼 때가 왔다.

대외적으로 남북경협과 대화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은 미·일과 중국의 협조이다. 미·일은 그들의 대북협상에서 남북대화의 중요성을 일관되게 강조해야 할 것이다. 이제 북한과 고위급 정책협의를 부활하고 있는 중국도 현재의 형식적 발언 이상으로 북한이 남북대화에 호응하도록 더욱 적극적인 역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매우 세련된 외교적 조율을 한국이 착실하게 성공시켜 나가야 북한의 정책전환을 도출할 수 있다. 이에 못지 않게 긴요한 것은 국내에서 대북정책의 정치쟁점화를 피하는 일이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정파들, 언론, 시민단체 등의 각계 인사들이 꼭 지켜야 할 공동과제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곧 북한의 긍정적 호응과 강대국들의 외교적 지원을 획득할 수 있는 관건이기 때문이다. /안병준 연세대 교수·국제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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