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조선일보 문화면에는 ‘일사일언’이라는 외부 필자들이 참여하는 고정 칼럼이 있다. 많은 문화계 인사들에게 ‘일사일언’은 문화계 논객으로 진입하는 한 관문처럼 여겨지지만, 이 칼럼이 언제부터 시작됐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다 이것이 1924년 시작돼 조선일보 80년의 역사와 운명을 함께 해온 국내 최장수 문화 칼럼이며, 왕년에는 춘원 이광수 등 현대 문화사의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필자로 참여했다는 걸 알고는 새삼 그 역사성에 놀란다.

학계 전문가들 사이에서 흔히 일제하 문예사는 조선일보를 빼놓고는 쓸 수 없다는 말을 많이 한다. 이는 특히 조선일보 학예면의 전통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런 명예가 당시 조선일보에 재직했던 기자들만의 자랑일 수는 없다.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 연재, 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 연재, 한국 최초의 신춘문예 공모, 문자보급운동과 김동인의 ‘운현궁의 봄’ 등 근대 문예사를 화려하게 수놓은 조선일보 학예면의 신화는 그래서 가능했다.

조선일보에 학예부가 설치된 해는 분명치 않다. 초대 학예부장은 신문삽화의 선구자 안석주(안석주)였다. 조선일보 학예부가 본격적 성가를 올린 것은 30년대 10년 동안이었다. 편집고문인 문일평(문일평)과 수습기자 출신인 김기림(김기림)을 비롯, 홍명희(홍명희) 염상섭(렴상섭) 주요한(주요한) 김기진(김기진) 김동환(김동환) 민태원(민태원) 현진건(현진건) 등이 모두 이 시대 학예부 기자이거나 부장들이었다. 기자와 문필가의 구별이 따로 없던 시절이었다. 지면에 장도빈(장도빈) 이은상(이은상) 최재서(최재서) 고희동(고희동) 최현배(최현배) 채만식(채만식) 백석(백석) 유진오(유진오) 등의 이름이 수시로 등장했다. 당대 첨단을 달리던 필자들이었다.

일제하 조선일보 학예면 영광의 대미를 화려하게 장식한 것은 1938년부터 127회에 걸쳐 연재된 ‘향토문화를 찾아서’란 한국학 시리즈였다. 홍명희 손진태 이병도 이능화 권덕규 이병기 고유섭 송석하 황의돈 문일평 등 당대 최고의 석학들이 한국학의 르네상스를 이뤄낸 쾌거였다.

조선일보 학예부 시절 이채로운 인물은 홍기문(홍기문)이다. 벽초 홍명희의 아들이기도 한 그는 기자로서 조선일보에 우리 말과 역사에 관한 중요한 논설들을 숱하게 발표하고 35년부터 39년까지 조선일보 학예부장을 지냈다. 해방 후 월북, 북한에서 ‘조선왕조실록’ 번역 간행을 주도한 한국학의 거목이었다.

/ 이한우기자 hwle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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