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보영
/99년 입국·아이스하키 국가대표 선수

북한에서 12살 때 아이스하키(북한에서는 「빙상호케이」라고 한다)를 시작했다. 고등중학교에 갓 입학했을 때 함북 청진의 김책제철체육단에서 우리 학교로 선수 선발을 위해 직접 찾아와 발탁됐다. 어머니가 기계체조를 했으므로 운동신경은 타고난 편이었다. 한국에서 아이스하키라면 비싼 장비를 마련할 수 있는 부유층이 주로 할 수 있는 것으로 인식되어 있지만, 북한에서는 일단 시작하기만 하면 개인이 돈을 낼 필요는 없다. 장비는 무료고, 링크 대관료 같은 것도 없다. 오히려 북한에서는 자식이 체육계에 발을 들여놓으면 한 입 덜었다고 좋아한다.

함북 청진에 있는 김책제철체육단 선수가 된 나는 일찍부터 집을 떠나야 했다. 아이스하키뿐만 아니라 어떤 운동이든 직업적으로 해야 하는 경우는 일단 집을 떠나 기숙사 생활을 한다. 학교공부와 운동을 병행하다 보면 몹시 고단하다. 그러나 체육단 선수라는 신분을 얻게 되면 학생 때부터 월급을 따로 받는다. 노동자 평균 월급의 4분의 1선인 북한돈 25원이었다. 학교를 졸업한 선수는 급수에 따라 무급은 80원, 4급부터는 100원 넘게 받는다. 식량난이 심해지기 전까지는 신발, 양말, 빨랫비누까지 공급됐다.

훈련 내용은 요일마다 다르고 오전 오후가 또 다르다. 토요일 오후는 20리 길을 달리기만 한다. 일요일은 쉬기 때문에 토요일 훈련이 제일 세다. 한여름에는 쨍쨍 내리쬐는 햇볕 아래 검게 그을리고, 겨울에는 야외 빙상장에서 거센 바람을 맞으며 훈련해 손발에 동상을 입기 일쑤다.

아이스하키 선수들에게 가장 큰 경기는 2월의 김정일 생일을 계기로 하는 「백두산상」 체육경기대회와 4월 김일성 생일 때의 「만경대상」 체육경기대회다. 평양 빙상관에서 열린다. 4년에 한 번씩은 11월에 공화국선수권대회를 갖는다. 경기가 있을 때마다 평양에 가서 살다시피하는데, 공부는 거의 손을 놓고 한두 달 전부터 운동에만 몰두한다.

하이스하키는 남자는 평양 등 7개팀이 활동하고 있고, 여자의 경우 북한 전역에 4팀이 있다. 내가 속해 있었던 함북의 김책제철체육단과 양강도·자강도체육단, 그리고 강계체육대학 팀으로 모두 추운 북쪽 지방에 있다. 네팀이 연맹(리그)전을 펼쳐 3위까지는 메달도 수여받고 때로는 상품도 받는다. 네팀 중 하나만 탈락하는 셈이니 떨어진 팀은 망신이 톡톡하다.

잊지 못할 경기는 1995년 만경대상 경기대회. 양강도체육단과 결승경기를 치러 나는 처음으로 골을 터뜨렸다. 우리 팀은 6대2로 상대를 누르고 우승했는데 그 중 두 골은 내가 넣은 것이었다. 아이스하키의 매력이라면 강렬함이다. 속도감 있게 얼음을 지치며 몰아쳐가 튀어오르는 하얀 파편들과 함께 공을 쳐 넣을 때의 짜릿함이란 형언하기 어렵다.

어려서부터 합숙훈련만 하다보니 동료애도 강하다. 6명이 한 방을 쓰며 합숙을 할 때 우리는 키가 멀대처럼 크고 유난히 피부가 하얗던 김봉련 선수를 왕따시키곤 했다. 이유없이 이불을 뒤집어 씌운다거나 자고있는 얼굴에 사인펜으로 그림을 그려놓는 식으로 많이도 놀려 먹었던 동갑내기 친구 봉련이가 내년 일본에서 열리는 아시아경기대회에 참가한다고 한다. 나는 태극마크를 달고 한국 대표로 뛰게 될 것이다. 맞붙게 될 우리의 인연이 참 묘하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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