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훈(오른쪽부터) 청와대 국가안보실장, 제이크 설리번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기타무라 시게루 일본 국가안보국장이 2일(현지 시각) 미국 워싱턴DC 인근 해군사관학교에서 열린 한·미·일 안보실장 3자회의에서 함께 걸어가며 대화하고 있다.  /외교부 제공

서훈(오른쪽부터) 청와대 국가안보실장, 제이크 설리번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기타무라 시게루 일본 국가안보국장이 2일(현지 시각) 미국 워싱턴DC 인근 해군사관학교에서 열린 한·미·일 안보실장 3자회의에서 함께 걸어가며 대화하고 있다. /외교부 제공

지난 주말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동시에 열린 한·미·일 안보실장 회의와 한·중 외교장관 회의에서 미·중은 각자 북한 문제를 중심으로 경제, 문화 등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동참을 요구했다. 한국에 대해 미국은 “변함없는 동맹”, 중국은 “영원한 이웃” 이라고 추켜세웠다. 하지만 이런 의례적 외교 수사(修辭) 뒤에서 미·중 모두 ‘우리 편에 서라'고 한국을 압박한 것이다. G2 패권 경쟁 한복판에서 효력이 다한 한국의 ‘전략적 모호성'의 현주소가 그대로 드러났다.

백악관은 2일(현지 시각) 메릴랜드주 아나폴리스 해군기지에서 열린 한·미·일 안보실장 회의가 끝난 뒤 낸 성명에서 “북한의 핵·탄도미사일에 대한 우려를 공유하고 3국 간 협력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했다. 한·미·일의 대북 제재 강화에 방점을 찍은 것이다.

백악관은 또 “인도·태평양 안보에 관한 공통 관심사” “공통된 민주적 가치” 등을 언급하며 중국 견제도 중요 의제였다는 점을 암시했다. 이 자리에선 최근 전 세계적으로 부족 사태를 빚고 있는 반도체 등 첨단 기술 공급망에 대한 논의도 했다. 미국은 반도체와 인공지능(AI) 등을 중국과의 패권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한 핵심 요소로 보고 있다.

정의용 외교부 장관과 왕이 중국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이 3일 중국 샤먼 하이웨호텔에서 한·중 외교장관 회담을 시작하기 전에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의용 외교부 장관과 왕이 중국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이 3일 중국 샤먼 하이웨호텔에서 한·중 외교장관 회담을 시작하기 전에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반면 중국 외교부는 3일 왕이 외교부장이 푸젠성 샤먼에서 열린 한·중 외교장관 회담에서 “대화와 협상을 통해 한반도에 영구적인 평화 체제를 구축하며, 한반도 비핵화 달성을 위해 모든 당사자가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한국이 미국에선 대북 제재를 논의하고, 중국에선 협상을 논의하는 ‘이중 플레이’를 한 모양새가 된 것이다.

왕 부장은 또 “중국과 한국의 경제는 고도로 통합돼 있고 이해 공동체가 됐다”며 “중국은 5G, 집적 회로, 인공지능(AI) 등 분야에서 협력 강화에 집중하기 위해 한국과 기꺼이 함께 일할 것”이라고 했다. 첨단 기술에서도 중국 편에 서라는 것이다.

美 “반도체 국가안보 직결”… 中 곧바로 “한국은 반도체 파트너”

3일 중국 푸젠성 샤먼에서 열린 한·중 외교장관 회담에서 왕이 중국 외교부장이 반도체 등 첨단 산업 분야에서 한국이 중국의 협력 파트너가 되길 바란다는 뜻을 밝혔다. 2일(현지 시각) 오후 미국 아나폴리스의 미 해군사관학교에서 열린 한·미·일 3국 안보실장 회의에서 미국 측이 반도체 문제를 국가 안보와 직결된 문제로 보고 있다고 강조한 지 몇 시간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미·중 양국이 모두 안정적 반도체 공급망의 파트너로 한국을 지목하면서 미·중 어느 편에도 서지 않는 외줄 타기가 불가능해지고 있다. 안보 문제가 경제 영역으로 확장되고 융합되는 현상이 뚜렷해지면서 과거처럼 ‘정치는 미국, 경제는 중국’이란 정경 분리 논리가 통하지 않게 됐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과 중국에 모두 반도체 공장을 두고 있는 삼성전자는 큰 압박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한·중 외교장관 회담 후 중국 외교부는 “한·중 양국은 영원한 이웃”이라며 한국과 반도체 등 첨단 기술 분야에서 협력을 강화하고 싶다는 입장을 전달했다고 밝혔다. 중국 외교부가 홈페이지에 올린 회담 결과에 따르면 왕이 외교부장은 정의용 한국 외교장관과 만나 “한·중 경제는 고도로 융합돼 이미 이익 공동체가 됐다”고 했다. 왕 부장은 또 “중국은 한국과의 전략적 접촉, 제3시장에서 협력 분야의 발전 속도를 높이고, 한·중 자유무역협정 2단계 협상을 조기에 타결하며, 5G·빅데이터·녹색경제·인공지능·(반도체) 집적회로·신에너지·헬스케어 분야에서 협력을 강화해 고부가 가치 분야의 협력 파트너가 되길 원한다”고 했다.

 

한국 외교부 발표에는 “한·중 경제협력 공동계획을 가능한 한 조속히 채택”한다는 등의 문구만 있었고, 중국이 협력을 요청한 구체적 분야는 적시되지 않았다. 반도체·5G·AI 등 첨단 기술은 미국이 중국과의 경쟁에서 가장 민감하게 생각하는 분야다. 협력 요청을 받은 사실 자체가 우리 정부로서는 부담일 수밖에 없다.

앞서 열린 한·미·일 3국 안보실장 회의에서 미국 측도 반도체 등 첨단 기술 분야의 공급망 안전 문제를 거론한 것으로 알려졌다.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등 미국 측 참석자들은 반도체를 국가 안보 문제로 보고 있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반도체는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이 “반도체 부족의 해법을 찾아야 한다”며 직접 챙기고 있는 문제다. 바이든은 지난 2월 핵심 산업 분야의 취약성을 찾아내 보완하도록 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하는 자리에 반도체 하나를 들고 나와서 “(반도체는 작지만 없어서는 안 될) 21세기의 말편자 못”이라고 했다.

설리번 보좌관은 오는 12일 브라이언 디스 국가경제위원장과 함께 반도체 부족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산업계 지도자들을 불러 회의를 열 예정이다. 삼성전자도 이 자리에 초청받았다고 블룸버그통신은 보도했다. 반도체를 포함한 경제 문제가 안보와 융합되면서 국가안보실 외에 청와대 정책실장, 경제수석도 미국 측과 전화 협의를 한 적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이 협력을 요청한 다른 분야인 5G와 AI도 상황은 비슷하다. 미국은 트럼프 행정부 시절부터 화웨이와 ZTE 같은 중국 기업들의 5G 설비가 국가 안보에 위협이 된다며 이들을 배제한 ‘깨끗한 네트워크’를 만들어야 한다고 동맹국들에 촉구해 왔다. 이후 5G는 ‘과학·기술 냉전(冷戰)’이라고 불릴 만큼 미·중 대결의 최전선이 됐다. 미국 내에는 또 중국이 AI와 안면 인식 등을 이용해 신장 위구르 독립 세력을 탄압하는 등 첨단 과학 기술을 독재에 이용하고 있다고 비판하며 여기 맞서야 한다는 분위기가 형성돼 있다. 지난달 26일 취임 후 첫 기자회견에서 바이든은 “기술이 미래를 지배한다”며 “중국과의 효과적 경쟁을 위해 미국 과학에 투자할 것”이라고 했는데, 그가 집중 투자하겠다고 밝힌 분야들에는 AI가 포함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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