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이산가족들은 50년 만에 가족을 만난 흥분을 채 삭이지 못하는 것 같았다. 방북단은 “50년 만에 접한 평양의 깨끗한 모습과 친절한 사람들, 맛있는 고향의 음식 등이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가족들 얼굴에 고생한 흔적이 너무 역력해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동생을 만나고 온 신윤옥(여·75)씨는 “앳되고 귀여운 모습은 간 데 없고 주름살만 가득한 마른 얼굴에 가슴이 아팠다”고 말했다.
김시원(71)씨는 “옥류관 냉면이 맛있어 두 그릇이나 비웠다”며 “평양 거리는 차가 없고 공기가 맑아 인상적이었다”고 전했다. 100번째로 방북단에 뽑혀 동생들을 만나고 온 김준섭(66)씨는 “옷차림, 신발 등 평양시민들의 차림새가 생각과 달리 다양했다”고 말했다. 김씨는 시민들을 접촉하지는 못했지만 뉴스를 통해 우리가 방북한 것을 알고 있는 듯 지나갈 때마다 손을 흔들어주고 웃으며 환영했고 동생들도 체제 선전은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54년 만에 딸을 만난 김장녀(79)씨는 평양 체류 중 대동강에서 배를 탄 게 특히 인상에 남는다며 “평양 시민들이 반갑게 환영해주었고 녹두죽·호박죽·깨죽 등 음식도 입에 잘 맞았다”며 환하게 웃었다. 그러나 110세 어머니가 숨진 것을 뒤늦게 알고 방북한 장이윤(71)씨는 “행인도 드물고 전차를 제외하면 자동차도 거의 다니지 않아 60년대 우리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평양이 고향인 홍태호씨는 “대동문과 보통문은 그대로 있었지만, 길거리와 건물이 모두 바뀌어 어릴적 평양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며 “평양은 밤만 되면 불을 켜지 않아 매우 깜깜했다”고 말했다.
여동생을 만나고 돌아온 채성신씨는 “상봉 순간 혈육을 만난 반가움이 앞섰으나 여동생이 말끝마다 ‘수령님’ ‘장군님’하는 소리가 영 듣기 싫었다”고 말했다. 채씨는 “우리가 혈육 만나러 왔지 세뇌받으러 왔느냐”며 역정냈다고 말했다. 김찬하(77)씨는 “‘장군님’ 얘기를 너무 자주해 50년 만에 만난 아버지에게 그런 얘기만 하느냐”고 했다가 잠시 서먹해지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찬우(70)씨는 “첫 상봉 때 여동생이 뼈만 남고 이는 다 빠지는 등 알아볼 수가 없을 만큼 초라해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고향이 개풍인 상환식(73)씨는 “북에도 상씨 집성촌이 아직 있다고 하더라”며 “동생들도 반장인가 하는 직책을 맡아 생활에는 문제가 없다는데 얼굴과 몸이 너무 야위어 보기에 딱했다”고 말했다.
동생들을 만나고 온 이현모씨는 “개별상봉 때는 체제논쟁도 좀 했는데 ‘90년대까지는 북한이 더 잘 살았는데 이후 나빠졌다’고 하기에 ‘너희는 우물안 개구리’라고 말해줬다”고 전했다. 김찬하씨는 “북한 기자들도 남쪽 기자 못지 않게 극성이었다”며 “어딜 관광을 가도 기자들 성화 때문에 구경을 못할 정도였다”고 말했다.
/김수혜기자 sh-kim@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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