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보는 北 고려왕릉


                [사진으로 보는 北 고려왕릉] 고려 16대 예종(睿宗)의 유릉(裕陵)
[사진으로 보는 北 고려왕릉] 고려 16대 예종(睿宗)의 유릉(裕陵)

북한 개성지역에 흩어져 있는 60여 기의 고려왕릉은 오랜 세월 역사의 풍파에 시달리며 능주를 확인할 수 있는 시책(諡冊)이 대부분 분실됐다. 김정은 체제가 들어서며 대대적 발굴·정비에 나섰지만 18기의 능주만 확인했을 뿐이다. 남북을 아우른 500년 왕조의 유적이 처참하게 쇠락한 것이다. 이 왕릉들의 현재 모습을 살펴보는 것은 남북의 역사를 잇는 하나의 작은 발걸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뉴시스는 분단 75주년을 맞아 머니투데이 미디어 산하 평화경제연구소가 단독 입수한 500여 점의 개성지역 고려왕릉 사진을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장의 글과 함께 매주 연재한다. [편집자 주]


13회. 여진을 정벌하고 9성을 쌓은 고려 16대 예종의 유릉(裕陵)


고려 3대 정종(定宗)이 개성 외성(나성)의 경계를 이루는 용수산 남쪽에 묻힌 후 이 주변에는 여러 왕들의 무덤이 조성됐다. 정종의 (安陵) 서쪽 옆으로 20대 신종의 양릉이 있고, 용수산이 남쪽으로 뻗어 내린 능선에 30대 충정왕의 총릉과 16대 예종의 유릉(裕陵)이 자리 잡고 있다.

<고려사>에 예종이 1122년(예종 17) 4월 45세로 선정전(宣政殿)에서 죽으니 성의 남쪽에 장례를 지냈다고 나온다. 조선 중기에 나온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유릉은 “도성 남쪽에 있다”라고 기록돼 있다. 이곳은 과거 경기도 개풍군 청교면 유릉리였다가 행정구역이 바뀌면서 현재 개성시 오산리로 변경됐다.

유릉은 일제강점기 때까지만 해도 병풍석과 1단부터 3단까지 축대가 남아 있었고, 고종 때 세운 능비도 존재했다. 그러나 1963년 북한이 조사할 때는 봉토와 뒷산의 흙이 흘러내려 병풍석이나 난간석이 거의 다 묻혀 존재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황폐화 된 상태였다.

북한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는 1978년 이 무덤을 발굴한 후 병풍석을 새로 쌓는 등 능역을 정비했다. 정비된 후 봉분의 높이는 1.9m, 직경은 8m였다. 주검칸(석실)은 약간 서쪽으로 치우친 남향으로 반지하에 묻혀 있다. 발굴 당시 무덤칸(묘실)은 평천장으로 남북의 길이 2.88m, 동서 너비 1.84m, 높이 1.9m로 조사됐다.

무덤칸의 중심에는 남북으로 길게 관대가 놓여 있었는데, 길이는 2m, 너비는 0.86m 정도였다. 무덤칸 천정에는 별그림이 그려져 있었고, 북쪽 부분에서 그 일부가 확인됐는데 별들은 붉은색 동그라미로 형상되어 있었다.

발굴 당시 유릉은 여러 차례 도굴당해 대부분의 유물이 원래 위치에 놓여있지 않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고 한다. 무덤칸(묘실)에서는 부장된 청동제품과 철제품이 나왔다. 청동제품으로는 ‘청동원형 장식판’, ‘청동화폐’, ‘청동못’, ‘청동 자물쇠’ 등이, 철제품으로는 ‘쇠가위’, ‘문고리보강쇠’, ‘쇠조각’ 등이 출토됐다.

특히 유릉에서는 다른 고려 왕릉에서 나온 것보다 훨씬 많은 51개의 청동화폐가 출토돼 이 무덤이 유릉임을 뒷받침했다. 51개의 청동화폐 중 23개의 화폐에 이름이 찍혀 있는데, 그중 가장 이른 시기에 주조된 것은 ‘개원통보(開元通寶)’이고, 제일 늦은 시기의 것은 ‘소성원보(紹聖元寶)’이다. 소성원보는 북송(北宋) 철종(철종, 재위기간:1,085~1,100)대에 통용된 엽전이다. 고려시대 화폐가 발행됐으나 상거래에서 화폐보다는 현물거래가 더 활발했으며 일부 중국 화폐를 가져와 사용한 경우도 있었다.

예종(睿宗)의 이름은 왕우(王?)이고, 숙종(肅宗)과 명의태후(明懿太后) 유씨(柳氏)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1079년(문종 33)에 태어나 1100년(숙종 5)에 왕태자로 책봉된 후 1105년(숙종 10)에 즉위해 1122년(예종 17)에 사망했다. 소성원보가 송나라에서 유통된 12세기와 예종의 재위기간이 일치한다.


최근에 촬영된 사진을 보면 1978년에 발굴 후 정비된 모습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특이점은 2017년에 촬영된 사진에는 표지석에는 유릉이 ‘보존유적 551호’로 되어 있었는데, 지난해 촬영된 사진을 보면 ‘보존유적 제1701호’로 다시 변경됐다는 것이다. 유릉은 원래 보존유적 1701호로 알려져 있었다.

북한이 보존유적 지정번호를 변경했다가 최근 연간에 다시 수정한 것으로 추정된다. 북한은 2017년을 전후해 숙종(肅宗)의 영릉(英陵)을 국보유적으로 새로 지정하는 등 ‘국보유적’과 ‘보존유적’ 의 역사유적 지정체계를 대폭 변경한 것으로 보인다.


예종은 고려의 문풍을 진작시킨 군주로 평가된다. <고려사>에는 예종이 어려서부터 유학을 좋아했다고 기록돼 있다. 고려 말 유학자 이제현(李齊賢)도 예종이 문치를 닦아 예악으로 풍속을 바로잡으려 했다고 높이 평가하며, ‘17년 동안의 왕업이 후세에 모범이 될 만하다’라고 평가했다.

예종은 즉위 초부터 교육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1109년(예종 4)에는 국학에 7재를 설치하였다. 이곳은 각각 <주역(周易)>, <상서(尙書)>, <모시(毛詩)>, <주례(周禮)>, <대례(戴禮)>, <춘추(春秋)> 등을 전공으로 하는 심화된 유학 교육을 시행하는 기관이었다.

또한 뛰어난 학생들을 선발하여 송의 태학에 입학시키기도 했고, 송에서 보낸 대성악(大晟樂)과 각종 제기들을 받아들이기도 했다. 예종의 각종 정책을 통해 고려의 경학(經學) 수준이 한층 높아졌다고 보는 게 고려사 연구학계의 평가다.

예종은 풍수지리와 도참(미래예언), 불교 등 다양한 분야에도 깊이 관심을 가졌다. 1106년(예종 원년) 3월에 지리에 관한 책들을 모아 정리하여 <해동비록(海東秘錄)>을 짓게 하였고, 신하들에게 음양비술(陰陽?術)로 약해진 땅의 기운을 되살릴 방안을 제출하도록 명하기도 하였다. 유학적 원리에 따른 문치만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고려의 전통문화적 측면에도 폭넓게 관심을 기울인 것이다.

한편 27세의 나이에 왕위에 오른 예종에게는 당면한 큰 과제가 있었다. 선왕 숙종대에 터졌던 여진과의 갈등 문제였다. 11세기 말부터 북만주 하얼빈 일대에 살던 여진의 한 부족인 완안부(完顔部)의 세력이 강성해지면서 동북아시아의 정세가 요동치기 시작했고, 그 여파는 점차 고려로도 미쳤다.

고려는 숙종 때 두 차례 걸쳐 완안부와 전투를 벌여 모두 대패하는 참사를 겪었다. 이에 숙종은 별무반(別武班)을 조직하여 대규모 전쟁을 준비하였으나, 준비 도중에 병에 걸려 사망하였다.

1107년(예종 2) 10월, 여진이 다시 침입해오자 예종은 조정의 신하들과 논의를 거쳐 여진 정벌을 단행하기로 결정하였다. 당대의 중신이었던 윤관(尹瓘)을 원수(元帥)로 삼아 약 17만 명의 대군을 동원한 큰 전쟁이었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고려는 새로 확보한 영역에 여러 성을 쌓아 방어 거점을 만들었다. 이 성들은 통칭 ‘9성’이라 불린다. 예종은 남부로부터 6만5000여 명의 주민을 이곳으로 이주시켜 살게 하였다.

그러나 2년 뒤인 1109년(예종 4) 5월, 예종은 화친을 청해온 여진에게 9성을 반환하기로 결정했다. 비록 여진으로부터 침범하지 않고 조공을 바치겠다는 맹세를 받아냈으나, 국력을 기울인 원정에서 실질적인 소득은 거의 없었다. 이렇게 예종이 힘을 쏟았던 여진 정벌의 꿈은 미완으로 끝이 났다.

예종은 거란의 공격을 당당하게 물리친 증조부 현종(顯宗)대의 고려, 문물이 융성하여 전성기를 구가했던 조부 문종(文宗)대의 고려를 재현하고자 했지만 고려에는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대외적으로 여러 차례의 북방족과의 전쟁이 이어졌고, 국내 정치적으로는 점차 문벌이 세력을 키웠으며, 이자겸(李資謙)으로 대표되는 외척 세력이 성장했다. 백성의 생활은 전란과 기근, 지방관들의 기강 해이 등 여러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점차 어려워졌다. 이러한 문제점들이 누적되어 결국 예종의 아들인 인종대에 폭발하게 된다.

예종의 첫 번째 왕비인 경화왕후(敬和王后)는 1109년(예종 5년) 사망해 자릉(慈陵)에 안장했다고 기록돼 있는데, 현재 위치는 확인되지 않는다.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 소장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3/28/202003280042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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