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신년특집] [백선엽과 김형석, 文武 100년의 대화]
[1] 이광수, 김일성 그리고 이병철

金 "어릴 때 옆 동네 살던 김성주가 김일성 장군이라고 해 놀라"
白 "김일성 평양 환영회 갔는데 군중들이 말도 안된다며 비웃어"

金 "친일파라는 춘원 없인 독립 못했을 것… 그 덕에 민족의식 키워"
白 "당시 최선 다해 실력 키우려 노력, 일본서 배울 건 배워야 했다"

金 "한국만큼 교육에 열정 쏟은 나라 없어… 그게 발전 거름 됐다
이병철, 사람 키우면 삼성 떠나도 한국에 남을 거니 괜찮다고 해"
 

백선엽 장군은 6·25전쟁의 영웅이다. 다부동 전투를 비롯해 주요한 전투에서 기념비적인 승리를 거둔 우리 현대사 최고의 명장(名將)이다. 33세 때 한국군 최초로 대장 계급장을 달았다. 미군은 지금도 백 장군에게 경의를 표한다.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는 김태길·안병욱 교수와 함께 국내 1세대 철학자 삼총사로 불렸다. 1954~85년 연세대에서 철학을 가르쳤고, 이후 명예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두 사람은 모두 1920년생이다. 지난 100년 동안 한민족의 삶을 직접 경험하고 지켜봤다. 본지는 창간 100주년을 맞아 대한민국의 한 세기를 돌아보고, 향후 100년에 대한 지혜를 얻고자 특별기획 '문무(文武) 100년의 대화'를 마련했다.

크리스마스이브였던 지난달 24일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 429호 군사편찬연구소 자문위원장실.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김형석 연세대 철학과 명예교수가 성큼 사무실로 들어서자 빨간 넥타이를 맨 정장 차림의 백선엽 장군이 소파에 앉은 채 반가운 얼굴로 맞았다. 백 장군은 다리가 불편해 서 있기가 어려운 상태다. 이동할 땐 휠체어를 사용한다. "어서 오세요, 잘 지내셨어요?" "네, 백 장군님도 건강하시지요?" 100세를 맞는 두 사람의 대화는 소박한 소재로 시작됐다. "백 장군님, 저와 나이가 같은데 몇 월생이세요?"(김 교수) "제가 11월 23일생입니다."(백 장군) "그러세요? 저는 4월 23일입니다."(김 교수) "그러면 제 형님이시네요, 형님."(백 장군) "아, 그런가요. 하하하."(김 교수)

 
 

◇고향, 김성주 그리고 김일성

두 사람은 중학교 졸업 때까지 주로 평양과 그 인근에 살았다. 백 장군은 평남 강서군 강서면 덕흥리에서 태어나 여섯 살 때 평양으로 이사했다. 김 교수는 지금의 만경대에서 1㎞ 떨어진 송산리에서 자랐다.
 

 

6·25전쟁 영웅인 백선엽 장군(앞)과 국내 철학계 1세대 학자인 김형석 연세대 철학과 명예교수가 조선일보 창간 100주년 기획 ‘文武 100년의 대화’를 위해 만났다. 두 사람은 모두 올해 만 100세가 된다. 사진은 지난해 11월 11일 서울 중구 성공회 성당에서 김 교수가 백 장군 휠체어를 밀고 있는 모습.
6·25전쟁 영웅인 백선엽 장군(앞)과 국내 철학계 1세대 학자인 김형석 연세대 철학과 명예교수가 조선일보 창간 100주년 기획 ‘文武 100년의 대화’를 위해 만났다. 두 사람은 모두 올해 만 100세가 된다. 사진은 지난해 11월 11일 서울 중구 성공회 성당에서 김 교수가 백 장군 휠체어를 밀고 있는 모습. /오종찬 기자

김―백 장군 태어나신 마을의 강서약수터가 아주 유명했다. 우리 집에서 40리 정도였는데 걷기도 하고, 때론 자전거를 타고 물을 뜨러 자주 다녔다.

백―저도 몇 번 그 약수터에 가본 적 있다. 우린 참 인연이 많다.

두 사람은 "몇 해 전 김동길 교수가 만든 '장수클럽'에서 처음 만난 이후, 이번이 두 번째"라고 했다. 하지만 어쩌면 어렸을 때 약수터에서, 혹은 평양 길거리에서 여러 차례 스쳤을 수도 있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소학교 졸업 후 김 교수는 평양에서 숭실중·제3공립중, 백 장군은 평양사범을 다녔다.

―여덟 살 위 김일성이 옆 동네 산 셈이다.

김―해방 직후, 이웃 동네 김씨네 할아버지가 손자 김성주가 만주에서 돌아왔다고 인근 어르신들을 초대했다. 20여명이 갔는데, 대학 나온 사람이 저뿐이라며 같이 가자고 해서 갔다. 김성주는 창덕소학교 선배지만 그때 처음 봤다. 그 자리에서 김성주는 친일파 숙청, 모든 국토 국유화, 지주·자본가 숙청 등 여섯 가지를 얘기했다. '이 사람 공산주의자구나' 생각했다. 얼마 후 평양공설운동장에서 '김일성 장군 환영회'가 열렸다. 그곳에 다녀온 동네 어른들이 '김일성 장군이 성주야, 성주' 그러더라. 무슨 말이냐고 물었더니 '김일성 장군이 너무 젊어 보여 가까이 가보니, 아, 우리 앞 동네 성주더라고' 했다.

백―저도 그 환영회에 갔다. 소련군 장성이 단상의 청년을 가리키며 '항일 전투의 영웅 김일성 장군'이라고 소개했다. 군중이 웃으며 말도 안 된다고 수군거리던 장면이 선명하다. 해방 직후 고당 조만식 선생 비서로 일할 때도 두세 번 사무실에 찾아온 그를 봤다. 다소 거만하게 보이는 미소를 띠며 말이 많다는 인상을 받았다.
 

김일성(왼쪽)은 1945년 10월 14일 평양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김일성 장군 환영회’에서 처음으로 일반 대중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김일성(왼쪽)은 1945년 10월 14일 평양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김일성 장군 환영회’에서 처음으로 일반 대중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로부터 5년 후, 백 장군과 김일성은 6·25전쟁 때 한민족의 운명을 놓고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승부를 펼치게 된다.

김―김일성이 태어났을 때 우리 아버지의 외숙모가 3개월 동안 젖을 먹여 키웠다. 그 할머니와 김일성 어머니는 같은 강씨였고, 같은 마을 출신이다. 비슷한 시기에 친정에서 출산했고, 김일성 어머니가 젖이 안 나와 그 친척 할머니가 대신 젖을 물려줬다. 나중에 그 할머니의 아들 3명 중 2명이 북한 공산당에 죽었다. 그 할머니는 "그놈(김일성) 젖 먹일 때 코를 콱 막아 죽였어야 했다"며 원통해했다.

◇누가 그들을 親日이라 말하는가

―어렸을 때 꿈이 뭐였나.

백―지독한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평양으로 이사한 뒤 1년 정도 지났을까. 홀어머니는 우리 삼 남매를 데리고 대동강에 빠져 죽으러 갔다. 밥 한 끼 먹기 힘든 때였다. 다섯 살 위 누이가 어머니께 "나무도 뿌리를 내리려면 3년이 걸린다고 한다. 우린 평양 온 지 1년밖에 안 됐다. 한 번만 더 참고 살아보자"고 했다.

김―꿈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먹고사는 것 자체가 힘들었으니까. 소학교 졸업식 날 어머니는 고무신이 없어 옆집에서 빌려 신고 갔다. 닳을까 봐 허리에 끼고 학교 근처에 가서야 신었다.

―한일강제합병 10년 후에 태어났다. 한민족이란 의식은 있었나.

백―우리 말을 쓰고 우리 전통문화가 있는 한 한민족의 정체성은 사라질 수 없다. 평양사범 다닐 때는 조선 학생과 일본 학생 사이에 싸움도 종종 있었다.

김―오늘날 대한민국 성공을 탄생시킨 출발점은 3·1운동이다. 생활과 사고의 단위가 국가와 민족으로 올라갔다. 근대적 의미에서 나라와 민족이 있어야 나와 내 가족이 존재할 수 있다는 의식이 크게 싹텄다. 온 백성이 배워야 산다고 깨달았다. 각 지역 교회마다 학교가 생겼다.

―당시 춘원 이광수, 인촌 김성수 선생 등에 대한 평가는.

김―춘원과 인촌 같은 분들이 없었다면 우린 독립을 못 했을 거다. 고(故) 안병욱 교수는 "이광수 소설 '유정'을 읽고 민족의식을 깨달았다"고 했다. 그 시대 사람들 중 95%는 춘원 등 때문에 민족의식을 갖게 됐다. 그분들 때문에 친일한 사람은 없을 거다. 좌파 정권 때 친일파 딱지 붙이기 바람이 부는데 전적으로 정치적인 동기 때문이다. 지금 사람들이 어떻게 그분들을 친일이라고 재단하는가.

백―일제 치하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최선을 다해 실력을 키우는 것이었다. 일본에서 배울 게 있으면 배워야 했다. 언젠간 독립이 오겠지 생각은 했지만 그게 곧 올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때였다. 실력이 중요한 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김―그땐 무조건 일본 사람보다 앞서면 최고였고, 자랑이었다. 손기정이 올림픽에서 마라톤 우승했을 때 정말 대단했다. 안익태와 최승희는 음악과 무용 쪽에서 따라갈 사람이 없었다.

김 교수는 중학교 3학년 때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학교를 자퇴했다. 만주에서 유학 왔던 동급생 윤동주는 "만주로 돌아가겠다"고 학교를 떠났다. 김 교수는 학교를 떠나 있던 1년 동안 평양부립도서관에서 철학과 문학, 소설을 읽었고 이때 독서가 바탕이 돼 철학과 교수가 됐다. 백 장군은 어릴 때부터 "힘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고, 일본한테 더 배우고 익혀 강해지겠다며 평양사범 졸업 후 만주군관학교에 입교했다.

◇교육, 우리 민족의 가장 강력한 저력

김―전 세계 어딜 다녀봐도 지난 한 세기 동안 우리만큼 교육에 열정을 쏟은 민족, 국가는 없다. 그게 독립의 씨앗이 됐고, 국가 발전의 거름이 됐다. 6·25전쟁 직후 사람들이 "우리도 필리핀만큼만 잘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하곤 했다. 그런데 지금 우린 필리핀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잘산다. 우리가 한창 성장할 때 삼성 이병철씨를 만났다. 신입 사원 교육에 너무 많이 투자하는 것 아니냐고 했더니 "사람을 키우면 삼성 떠나도 한국에 남으니까 괜찮습니다"라고 하더라.

백―초등학교 때부터 평양부립도서관에 자주 가서 책과 신문을 읽었다. 도서관 정문 오른쪽 열람실에는 항상 신문들이 있었다. 조선일보·동아일보와 일본 신문들도 있었다. 신문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조선의 냉혹한 현실이 어떤지 알려주는 창이자 등불, 스승이었다.

김―전 세계 문화권을 만든 나라는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일본 등인데 공통점은 국민의 절대다수가 100년 이상 책을 읽은 나라라는 점이다. 이탈리아, 스페인 등은 영국보다 먼저 발전했지만 독서를 안 해서 처졌다.

[김형석 교수의 질문]

日帝의 학교 폐교 협박에 신사참배장 맨 앞에 서서
눈물 쏟던 교장 선생님… 그는 친일파인가 아닌가

숭실중은 미국 선교사가 세웠다. 당시 일본 총독부는 신사참배를 하지 않으면 학교 문을 닫게 하겠다고 협박했다. 이 때문에 미국 선교사인 교장이 떠났다. 평양의 기독교 유지들이 대책회의를 한 끝에 학생 500명이 다니는 학교를 문 닫게 할 수 없다며 장로 한 분을 교장으로 보냈다. 신사참배 문제로 1년간 학교를 그만뒀던 김 교수는 복학 이후 어쩔 수 없이 신사참배에 참여했다.

신사참배 날 교장이 제일 앞에, 그 뒤로 교사와 학생들이 종렬로 섰다. 키가 제일 작아 학생 줄 제일 앞에 있었던 김 교수는 교장 선생님 얼굴을 똑똑히 봤다. 유난히 늙어 보이는 얼굴에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학생들이 뒤에 있어 손을 올려 눈물을 닦지도 못했다. 김 교수는 깨달았다. '이분이 우릴 대신해 십자가를 졌구나.' 김 교수는 묻는다. "이 교장 선생님은 친일파인가, 아닌가."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1/02/202001020028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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