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석조 정치부 기자
노석조 정치부 기자

서울은 봄이 한창이지만, 지난달 25일 북·러 정상회담이 열린 블라디보스토크는 여전히 겨울이었다. 밤 10시가 되자 대부분 식당은 문을 닫았다. 하지만 캄캄한 거리 한쪽에, 자정이 다 되도록 불을 켜놓고 영업을 하는 식당이 있었다. '평양관'이란 북한 식당이었다. 가냘픈 북 여성 두 명이 약 50석 규모의 식당에서 주문을 받고, 계산을 하고, 바닥을 쓸고, 잔반 처리를 하고 있었다. 이들은 짬짬이 노래를 부르며 공연도 했다. 얼굴엔 피곤함이 가득했다. 주방 안쪽의 구석에는 작은 침실이 있었다. 자정 넘어 일을 마치면 이곳에서 잠을 잔다고 한다.

이곳 북한 식당 직원들은 하루 종일 뼈 빠지게 일해도 손에 들어오는 건 몇 푼이 안 된다고 한다. 식당 수익금 대부분을 당 간부에게 상납한다. 먼 이국 땅까지 나와 '노동 착취'를 당하고 있는 것이다. 러시아에는 최악의 노동 환경에서 혹사당하는 북한 외화벌이 노동자가 1만3000명이 넘는다. 이곳에 온 일부 벌목공은 비인간적인 환경에서 살인적 노동에 시달리다 병들고 목숨까지 잃고 있다. 그래서 국제 인권단체들은 이곳 노동자들의 처지를 '노예'라고 표현한다.

김정은은 북·러 회담 다음 날인 26일 블라디보스토크 최고급 식당에서 야생 사슴과 곰 고기로 점심 식사를 했다. 그는 전날 푸틴 대통령과 만나 북 노동자 송출 문제를 논의했다. 하지만 북 노동자들의 근무 여건 개선이나 인권에 대해 논의했다는 얘기는 전혀 나오지 않았다. 파견 노동자들 사이에선 이번에 김정은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김정은은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문 3일 동안 외화벌이 노동자들을 찾지 않았다. 공식 석상에서 이들을 격려하거나 위로하는 말도 하지 않았다. 김정은에게 그들은 자신에게 외화를 벌어다 줄 수단일 뿐 보호해야 할 대상은 아닌 것 같다. 그가 비핵화 협상을 통해 경제 제재를 풀려는 것이 과연 '인민'을 위한 것인지도 의문스럽다.

우리 정부도 해외 파견 북 노동자나 탈북자들의 인권 문제에 눈을 감고 있는 듯하다. 얼마 전 베트남에선 대사관 측이 탈북자들로부터 보호 조치를 요청받고도 신속히 대응하지 못해 이들이 추방되는 일이 벌어졌다. 중국에서도 열 살 여아를 포함한 탈북자 7명이 공안에 체포돼 북송 위기에 처해 있다. 정부는 그동안 유럽연합(EU)·일본과 함께 참여해 오던 북한인권결의안 공동 제안국에서 빠졌다. 북한인권재단은 출범도 하지 못한 채 사무실 문을 닫았고 북한인권국제협력대사 자리는 1년째 공석이다. 북한 눈치를 보느라 북한 인권을 외면한다는 비난이 나오는 이유다.

김정은의 폭정을 못 이겨 나온 탈북자도, 김정은의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한 북 노동자도 모두 우리가 보살피고 지원해야 할 사람들이다. 우리 정부가 외면하면 이들은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5/03/201905030316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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