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준용 국제부 기자
배준용 국제부 기자

전대미문의 초(超)인플레이션으로 전 국민이 생존의 위협을 받는 베네수엘라의 참상을 전하는 기사에는 "우리가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야 한다"는 댓글이 늘 적지 않게 달린다. 한때 석유 부국이었던 나라에서 국민 수백만 명이 기초 식량·의약품을 구하지 못해 영양실조에 시달리고 경제 난민을 자처하는, '초(超)현실' 같은 현실이 큰 충격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베네수엘라가 이 지경에 이른 근본 원인은 20여 년 이어진 좌파 정권의 무책임한 포퓰리즘 정책 때문이라는 게 이미 외신·전문가 사이엔 정설이다. 그런데도 베네수엘라 관련 기사에는 "좌파 포퓰리즘 때문이 아니고 미국의 부당한 제재 때문"이라는 댓글이 적지 않게 달린다. "북유럽 선진국도 다하는 무상 복지, 무상 의료가 왜 포퓰리즘이냐"는 반문도 늘 나온다.

현재 베네수엘라를 겨냥한 미국의 제재 대부분은 부정 선거를 저지른 마두로 정권의 핵심 인사들을 징벌하고, 이들의 부정 축재를 막기 위한 장치다. 제재할 만한 일을 저지르지 않았다면 미국이 제재할 일도 없었을 거다.

같은 복지도 베네수엘라처럼 하면 포퓰리즘이 맞는다. 우고 차베스 전 대통령과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은 무상 의료, 무상 교육 같은 빈민층 지원 정책을 위해 석유 기업을 국유화하고, 그 매출을 무리하게 끌어다 썼다. 그 탓에 석유 생산 시설을 제대로 유지·보수할 자본이 부족해져 수출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석유 산업이 붕괴했다. 북유럽 선진국 중 어느 나라도 자국의 핵심 산업을 파탄 내면서까지 복지를 하진 않는다.

실상이 이런데도 억지스러운 해석과 주장이 거듭 나오는 건 북한의 비핵화를 압박하는 '미국의 제재'가 마냥 싫거나, 좌파 정책은 베네수엘라 사태와 무관하다고 믿고 싶은 이가 적지 않기 때문일 거다. 과거에는 베네수엘라를 이상적인 국가 모델로 제시했다가 지금은 "대중영합주의로 망한 게 아니다"라며 사태의 본질을 호도하는 진보 언론과 공영방송, 일부 학자의 자기 합리화도 한몫했다.

마두로 정권은 지금까지 경제 파탄의 책임을 제대로 인정한 적이 없다. 번번이 "위기는 미 제국주의자들의 음모 때문"이라며 남 탓을 했다. 실패를 부정하고 잘못된 정책을 고집하는 태도가 위기를 더 키웠다.

이를 보며 "남 일 같지 않다"는 말이 나오는 건 한국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최 저임금 급등 등으로 청년, 영세 상인, 중소기업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도 정부는 요지부동이다. 오히려 국민의 분노를 다른 데로 돌리기 위해 "과거로 되돌아가려고 한다"며 비판 세력에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 현실을 있는 대로 보지 못하고, 실패를 인정하지 않을 때 어떤 현실이 기다리고 있는지 베네수엘라가 처절히 보여주고 있는데도 배우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4/03/201904030358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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