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해범 동북아시아연구소장
지해범 동북아시아연구소장

문재인 대통령이 '한반도 운명의 주인은 우리'라는 말을 자주 한다. 지난달 25일 청와대 수석 보좌관회의에선 "한반도 운명의 주인은 우리다" "한반도 문제의 주인으로서… 비핵화와 항구적 평화의 길로 나아가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3·1절 100주년 기념식에서도 "'신한반도 체제'는 우리가 주도하는 100년의 질서"라고 했다. 문 대통령 말대로 우리 운명을 우리(한국인)가 주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현실은 정반대로 가고 있다. '한반도 운명을 좌우'하는 북핵 회담에서 한국은 '왕따'가 되었다. 미국, 북한 모두로부터 신뢰와 존중을 잃었기 때문이다. 하노이 회담 과정에서 북한은 영변 외 다른 핵시설을 감추고 1차 미·북 회담 이후에도 핵 물질을 계속 생산한 것이 들통났다. 그동안 문 정부는 미국에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가 확고하다"고 주장해왔는데, 결과적으로 거짓 정보를 전달한 꼴이 됐다. 이에 미국은 한국과 사전 의제 조율도, 사후 정보 공유도 하지 않았다. '잔칫상'을 준비했다가 '초상집'이 된 듯한 청와대 분위기가 이를 말해준다. 북한 역시 손가락만 까딱해도 왕창 퍼줄 각오가 돼 있는 문 정부를 '중재자'로 여기는 것 같지 않다. 제재와 압박을 포기한 중재자는 견인력이 없다.

9·19 남북군사합의서는 문 대통령의 '한반도 주인론'을 뒤흔드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한·미 군사훈련을 중단하고 킬체인(한국형 미사일 방위 시스템)을 늦춘 것도 모자라, 북한은 군사 합의를 근거로 우리의 국방 계획까지 간섭한다. 북한 노동신문은 지난달 우리 국방부의 '2019~ 2023 국방중기계획'에 대해 "조선 반도의 항구적 평화를 바라는 겨레의 염원에 대한 도전"이라고 비난했다. 한국 합참의장이 설 연휴에 군비 태세를 점검한 일에 대해선 "대화와 평화의 시대적 흐름에 역행하는 것"이라고 공격했다. '북한 허락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식의 이런 생트집을 그대로 두고, 문 정부가 '한반도 주인'론을 말할 수는 없다.

북한은 급기야 한·일 군사 갈등에까지 끼어들었다. 북 노동신문은 2월 7일 자에서 일본 해상자위대 초계기의 저공 위협 비행에 대해 "영토 팽창 야망에 따른 고의적 도발 책동"이라며 "이들의 범죄적 망동을 단호히 짓부셔 버려야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일본이 한국을 건드리면 북한도 가만있지 않겠다는 투의 위협이다. 만약 머지않은 장래에 독도 군사 분쟁이 발생하여 핵 가진 북한이 한국 대신 일본을 저지한다면, '한반도 운명의 주인'은 5180만 한국민도, 문 대통령도 아닌, 북한 김정은이 될 것이다.

작년 9월 평양 옥류관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 한국 기업인들은 북측 리선권으로부터 "냉면이 목구멍으로 넘어갑네까"란 핀잔을 들었다. 듣는 사람에 따라 이 발언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지만,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한국 기업도 이제 북한 나와바리('세력 범위'란 뜻의 일본어)이니 우리 말을 잘 듣는 게 좋을 것'이란 협박으로 다가왔을 수도 있다. 김정은이 올해 신년사에서 "우리 마음을 같이한 남녘 겨레들에게 따뜻한 새해 인사를 보낸다"고 말한 것도 예사롭지 않다. 이는 지난해 "조국의 통일을 위하여 투쟁하는 남녘의 겨레들"이란 표현에서 한발 더 나아간 것이다. 북한이 노리는 것은, '김정은이야말로 한반도 전체를 책임지는 지도자'란 이미지를 심으려는 것이란 의구심을 떨칠수 없다.

한반도 운명의 주인이 되려면, 굳건한 군비 태세와 한·미 동맹, 정교한 외교 전략, 국민의 전폭적 지지가 바탕이 돼야 한다. 문 정부는 북한의 '위장 비핵화'가 확인된 상황에서도, 한·미 동맹과 한·일 관계를 약화시키고 대북 억지력을 훼손하면서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 재개 카드를 만지고 있다. 칼을 숨긴 강도의 좋은 말만 믿고 아파트 문을 여는 것만큼 위험하다. 이 길을 고집한다면, 한국은 '한반도 운명의 주인'은커녕, 김정은 전체주의 왕조 체제에 종속되는 돈줄 신세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3/12/201903120363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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