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4일 주중 스페인 대사관에서 난민지위 인정과 한국행을 요구하다 사건발생 하루만인 15일 중국측에 의해 추방돼 3박4일간 필리핀 마닐라에 체류해왔던 탈북자 25명이 18일 오후 무사히 입국, 드라마처럼 긴박했던 5일간의 여정이 막을 내렸다.

이들이 중국 베이징(北京) 주재 스페인 대사관에 진입한 순간부터 한국으로 오기까지의 닷새 일정을 재구성했다.

▲3월14일 = 스페인 대사관 진입과 한국행 요구 여섯 가족과 개인 3명(성인 14명, 10대 11명)으로 구성된 탈북자 25명은 14일 오전 11시(한국시간) 관광객 차림으로 경비근무중이던 중국 공안원을 밀치고 주중 스페인 대사관으로 진입, 난민지위 인정과 한국행을 요구했다.

거사 진행전 이를 사전에 통보받았던 외신 기자들은 이들의 대사관 진입장면과 함께 북한으로 강제 송환되면 자결하기 위해 독극물까지 품고 있다는 이들의 절박한 사연을 전세계에 타전함으로써 탈북자들의 운명은 국제적인 관심사로 급부상했다.

이들의 스페인 대사관 진입에는 북한에서 구호활동을 벌이다 추방된 독일인 의사 노르베르트 폴러첸씨와 일본 민간단체인 북한난민구원기금 관계자, 그리고 한국에서 건너간 민간단체 등이 가세해 성명서와 관련 자료 등을 영어로 작성하는데 도움을 제공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스페인 대사관을 장소로 선정한 데는 인권문제를 중시하는 유럽연합(EU) 의장국이라는 점, 다른 외국 공관에 비해 상대적으로 경비가 허술하다는 지리적 조건 등의 배경이 작용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사건 발생 직후인 이날 오후 2시께 정부는 김항경(金恒經) 외교통상부 차관주재로 대책회의를 갖고 외교부내에 이태식(李泰植) 차관보를 반장으로 하는 대책반을 구성하는 등 대처방안 마련에 착수했다.

외교부는 이어 주중 및 주스페인 대사관을 통해 ▲인도적 견지에서의 처리 ▲본인들의 의사에 반하는 강제송환 반대 ▲한국행 희망시 수용 입장을 전달토록 하는 한편 유엔난민고등판문관실(UNHCR) 등 국제기구의 협력도 요청했다.

비슷한 시각 중국은 장치웨(章啓月) 외교부 대변인의 정례브리핑을 통해 탈북자들이 '난민이 아니다'며 종전의 입장을 확인하면서도 '중국법.국제관례에 따라 인도주의적으로 처리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여기에 중국과 스페인, UNHCR 모두 우리 정부의 입장에 대해 `잘 알겠다'며 수용하는 태도를 보임으로써 이들의 한국행 가능성은 차츰 현실로 다가왔다.

비록 탈북자 문제 해결의 직접적인 열쇠는 중국과 스페인의 협상결과에 달려 있었지만 정부는 이들의 안전송환을 위해 국제법적 검토에 들어가는 한편, 14일 저녁부터 중국, 스페인과 직접 교섭을 벌였다.

이어 제3국을 경유한 한국행 가능성이 구체화되면서 관련당사국이 통보해준 제3국이 필리핀으로 드러나자 필리핀 당국과도 교섭을 벌이는 등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3월15일 = 제3국 추방과 필리핀 도착 이어 낮 12시 주룽지(朱鎔基) 중국 국무원 총리는 전국인민대표대회(全人大) 9기 5차회의 폐막에 즈음한 회견에서 '탈북자 25명의 신병처리 방안에 대해 합의했다'며 '신병처리 협상조건이 차후 발표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보다 앞서 서울에서는 탈북자들의 필리핀행 경유 한국 입국 보도가 나왔고 잠시후 탈북자들이 만하루를 머물렀던 주중 스페인 대사관에서 차량에 탑승, 빠져나오는 모습이 목격됐다.

결국 난민 지위를 인정받지 못한채 추방형식으로 15일 오후 3시께 중국 남방항공 CZ-377편으로 베이징을 떠난 탈북자들은 샤먼(廈門)을 경유, 이날 밤 9시47분(한국시간 밤 10시 47분) 마닐라의 니노이 아키노 공항에 도착했다.

그러나 도착직전 당초 마닐라에서 하루이틀 체류한뒤 17일이나 18일께 서울에 올 것으로 알려졌던 탈북자들의 일정은 마닐라 도착직전 `17일→16일→18일'로 변경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정부는 이날 오후 '탈북자들의 16일 입국은 불가능하며, 다만 가까운 시일내에 올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만 밝혔으며, 일부 당국자는 17일께 입국 사실을 내비쳤다.

하지만 프랭클린 에브달린 외무차관은 15일 오후 7시께 우리 정부 관계자들과 협상한 뒤 '탈북자들이 16일 한국행 첫 항공편으로 떠날 것'이라고 즉각 한국행을 기정사실화, 이를 발표했다.

당초 정부는 탈북자들을 사실상 한국측에 바로 인도해준 중국측의 입장을 고려, 주말을 제3국인 필리핀에서 보낸 뒤 입국시키고자 했으나 필리핀이 북한과의 관계를 감안해 완고한 입장을 보였고 이에 따라 정부도 15일 밤 대책회의 끝에 탈북자들을 16일 오후 입국시키기로 하고 이를 수용, 발표했다.

그러나 이 발표직후 로일로 골레즈 국가안보보좌관이 마닐라 현지에서 '탈북자들이 모처에 머문뒤 3일내로 떠날 것'이라고 밝히는 한편, 글로리아 아로요 대통령이 한국 입장을 배려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으로 알려져 또 다시 반전이 이뤄졌다.

▲3월16-17일 = 서울행 일정 확정과 탈북자 안도 우리 정부는 16일 새벽 필리핀측의 진의를 파악하느라 동분서주, 결국 오전 9시10분께 필리핀측으로부터 '한국측의 당초 요청을 수락한다'는 입장을 공식 전달받고 탈북자들의 입국날짜를 18일 오후로 최종 결정, 언론에 발표했다.

정부는 이와 함께 탈북자들의 건강상태에 문제가 생길 것에 대비, 의사 박영길씨와 간호사 김명애씨 등 의료진을 오후 7시 40분 서울을 출발하는 필리핀항공 PR-469편으로 급파했다.

15일 밤부터 마닐라 케손시에 위치한 아귀날도 기지에서 머물던 탈북자들은 16일부터 그간의 심리적 압박감 등을 떨쳐버리고 급속도로 안정을 찾았다.

또 이들은 18일 서울로의 출발 전까지 도시락에 된장국 등을 주메뉴로 식사를 했으며 '남한으로 가게돼 감격스럽다'며 서울에서의 새로운 생활에 대한 기대감에 젖어 안정된 체류생활을 했다.

▲3월18일 = 감격스런 서울행 탈북자 25명은 18일 오전 마닐라 체류생활을 일찌감치 정리하고 이날 오전 아키노 공항으로 이동, 낮 12시 40분께 서울행 대한항공 KE-622편에 탑승을 완료, 대부분 설레는 마음을 애써 감추지 않았다.

당초 이 비행기는 12시 40분께 이륙예정이었으나 공항사정으로 출발예정 시각보다 25분 가량 늦은 오후 1시 5분 출발했으며, 3시간 30분여의 비행시간 끝에 꿈에도 그리던 남녘땅에 발을 내딛어 긴박했던 5일간의 한국행 여정에 마침표를 찍었다./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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