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벌어진 어깨에 늑대 가죽 털옷을 걸친 사내. 그 사내가 멈춰선 곳에 우뚝 선 장대한 자연석, 그리고 한자로 음각된 비문. “북만주 벌판으로부터 서쪽으로는 내몽골 동부까지 정벌하고, 요동·요서 일대를 수복하고 말머리를 남으로 돌려 신라를 치러 온 왜병을 대파…. ”

광개토대왕비 앞에서, 방랑자 연개소문은 200년전 나타났던 불세출 거인의 행적을 접하고는 감격한다. 소설은 그렇게 시작한다.

‘고구려’는 무엇인가. 작가 유현종은 ‘우리 역사에서 유일하게 세계국가를 건설하겠다는 대망을 가졌던 나라’ ‘수의 140만, 당의 200만 대군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나라’를 소설가의 상상력으로 생생하게 살려낸다. “고구려 멸망 후 지금까지 우리 민족이 당한 수난과 수모를 생각해보라”면서, 거친 입담으로 1500년전의 대제국을 소설로 엮었다.

지난 75년부터 4년간 ‘연개소문’이란 제목으로 한 일간지에 연재되었던 소설이다. 78년에 책으로 묶여 나오기도 했는데, 당시에는 등장인물 중심이었다. 연개소문, 을지문덕, 양만춘까지 고구려의 영웅들이 어디 한둘이던가.

작가는 이번에 개정판을 내며 고구려라는 거대국가 자체에 초점을 맞추었다. 수·당과의 전쟁은 숨가쁘고 신라·백제·왜와의 외교 또한 긴박하다. 말갈, 돌궐 등 주변국들과의 관계도 흥미를 더하며 대제국 고구려의 위용을 드러낸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소설의 미덕은 이야기이고 재미다. 더구나 그 소설이 역사를 다룬 대하물일 때에야…. 알려진대로이지만, 작가 유현종은 그간 6권짜리 ‘임꺽정’ 5권짜리 ‘대조영’ 외에 ‘계백의 혼’ ‘삼별초‘등 역사소설을 숱하게 써왔다.

‘이야기’와 ‘재미’로는 이미 일가를 이룬 작가인 셈이니, 책장 넘기는 맛이야 믿어주는데 무리가 없겠다. 또 이번에 소설을 개정하는 과정에서 많이 들어냈다고는 하나, 남녀관계를 여유롭고 넉넉한 문체로 다룬 점 또한 ‘고구려’ 읽는 재미를 배가시킨다.

작가는 고구려의 방대한 역사를 시작하기 전 서문에서, 을지문덕의 이름을 드높였던 ‘살수대첩’의 ‘살수’에 대해 남북학계가 의견일치를 보지 못하는 점을 아쉬워한다.

살수를 두고 남은 평북 청천강을, 북은 요서·북경 가까운 릉하를 지목하고 있다 한다.

작가는 그래서 이런 결심이다. “릉하가 살수라 한다면 고구려의 판도가 달라지며 광개토대제 이후의 대수(대수) 대당(대당) 전쟁사는 다시 씌어져야 한다. …훗날 북한의 살수 추정이 올바르다고 판정 되면 그때 가서 다시 개작을 하겠다. ”

/이지형기자 jihyung@chosun.com
저작권자 © 조선일보 동북아연구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