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에도 북한 측의 이산가족 상봉 대상자 명단에 포함된 전국 이산가족들의 50년간 가슴에 담아뒀던 사연들이 이어졌다.

○…“내 잘못에 아들을 잃었다”며 평생을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아온 민병옥(97·충남 천안시 성거읍) 할머니는 아들 박상원(65)씨 소식에 내내 눈물을 흘렸다. 생활고 탓에 상원씨를 오빠 집에 맡겨 놓았다가 의용군에 끌려가는 바람에 생이별을 했기 때문.

“아들을 만나 보려고 지금까지 살아있었던 것 같다”는 민 할머니는 “하루빨리 상원이를 만나 그동안 못다한 얘기를 하고 싶다”며 고인 눈물을 훔쳤다.

○…김홍렬(72·대전시 유성구 장대동)씨는 동생 경렬(66)씨를 곧 만날 수 있다는 소식에 지난 밤을 뜬눈으로 새웠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홍렬씨는 “6·25전쟁 이듬해 인민군의 의용군 입대 통보에 경렬이가 ‘형은 장남이니까 내가 가겠다’고 자원해서 헤어진 뒤 그동안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몰랐다”고 말했다. 홍렬씨는 이어 “동생을 기다리다 10여년 전 사망신고를 했다”며 “죽은 줄 알고 상봉신청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죽은 줄로만 알고 있던 동생을 이제야 만날 수 있다니 꿈만 같습니다. ” 대구시 북구 태전동의 김치려(74·세무사)씨는 50년 당시 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 1학년생이었던 동생 치효(69)씨가 가족들을 찾는다는 소식을 듣고 밤 늦게까지 동생의 사진을 보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당시 대구시청에 다니던 김씨는 6·25가 발발하면서 서울 돈암동에서 하숙을 하던 동생 치효씨와 소식이 끊겼다. 서울 수복 후 포로로 잡혔다가 석방된 동생의 대학 동창들이 “치효가 원산에서 식량을 구하러 돌아다니는 것을 봤다”고 하는 말이 동생에 대한 마지막 소식이었다.

이후 김씨 등 가족들은 더 이상 치효씨의 소식을 듣지 못한 채 죽은 줄로만 알고 있었다고 했다.

○…북측의 리상운(67)씨가 찾는 가족 중 누나 상순(77·인천)씨와 형 상덕(71·철원), 여동생 상숙(65·춘천), 막내 상현(62·인천)씨 등 4남매는 모두 생존해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춘천시 동산면 원창리에 살고 있는 상숙씨는 “상운 오빠는 6·25 피란생활 중 집에 잠시 다녀오겠다고 떠난 후 소식이 끊겼으며 의용군으로 징병됐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상숙씨는 “오빠가 찾고 있는 부모님은 자식의 생존사실도 모른 채 돌아가셨다”면서 “8월 15일 5남매가 한자리에 모여 부모님의 넋을 달래드릴 계획”이라고 했다.

○…“그동안 아버지가 얼마나 애타게 오빠를 찾았는데 얼굴도 못보고 돌아가셔서 가슴이 아픕니다. 다행히 살아생전 오빠를 뵐 수 있다는 생각에 밤새 잠도 못잤습니다. ”

오빠인 윤수옥(69)씨를 만날 수 있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는 여동생 옥희(62·대구시 서구 비산동)씨는 남동생 석찬(47·충분 제천 세명대 교수)씨, 삼촌 윤권중(87·경북 예천군 예천읍)씨와 함께 감회에 젖었다.

헤어지기 직전 국민학교 교사였던 오빠 수옥씨는 교육을 받으러 간다며 집을 나섰다가 며칠 뒤 6·25전쟁이 터지면서 영영 이별하고 말았다고 했다.

○…변호사 박찬운(39·서울 서초구 반포동)씨는 18일 대한적십자사를 찾아 북한 방문신청자 명단에서 외삼촌 이길영(71)씨 이름과 사진을 확인하고, 그간 일가친척이 연좌제로 겪은 고난을 털어놨다. 84년 사법시험에 합격한 박 변호사는 “삼촌은 해방 직후 서울 선린상고에서 교편을 잡다 월북했다”며 “이 일로 인해 지난 2월 타계한 어머니가 평생 마음 고생을 했다”고 말했다.

/대전=임도혁기자 dhim@chosun.com

/인천=최재용기자 jychoi@chosun.com

/성남=권상은기자 sekwo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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